책 그 한 구절11 한강 《소년이 온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 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력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래요, 양심.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 2025. 1. 6. 이석원 『보통의 존재』 돌이켜보면 나는 선생님들이 '누구나 한 가지씩은 잘하는 게 있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기 마련이다' 등등의 사기를 안 쳤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으면 '왜 난 꿈이 없을까?' 이런 고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너는 커서 뭐가 될래?”만약 지금 내게 누가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살다 보면 생기겠죠. 끝까지 안 생길 수도 있겠지만.”나는 아직도 생의 의미를 명확하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전히 고민한다. 다만 분명한 건 누구나 배우가 되고 감독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나 감독이 될 자질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남은 생을 사는 동안 내가 그저 관객의 안온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꿈이 없다 뭐라 .. 2025. 1. 6. 김현승 「눈물」 「눈물」 김현승 더러는옥토(沃土)에 떨어지는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이 시는 1957년에 펴낸 김현승(1913~1975)의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다. 시에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을 ‘눈물’이라고 하였다. 기쁨이나 행복은 꽃처럼 피었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꽃이 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열매다. 꽃의 화려함이 사라지고 열매가 맺는다. 가지와 잎이 앙상해져야 열매가 익는다. 나무는 죽은 듯 말라가며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눈물이다. .. 2024. 12. 31. 황인숙 「강」 「강」 / 황인숙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나한테 토로하지 말라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당신이 직접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강가에서는 우리눈도 마주치지 말자. * 해 질 녘 한강둔치에 갔다가 술에 취했는지 강물에 대고 울부짖는 여인을 목격했다. 30대쯤 돼 보였다. 목이 쉴 것 같은 울음은 웃음이 되고 분노가 되고 외침과 한탄이 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실연을 당한 것인지 실직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쳐버리고 싶은 데 미쳐지지 .. 2024. 12. 30.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2024. 12. 28. 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 중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낮춤으로써 당신은 우리 가운데 계심을, 세상을 구하는 건 바로 너, 바로 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걸 가르치셨다. 우리가 서로에게 구인(救人)이 되지 못한다면 구세주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을 것이다.” “김장도 끝난 들판은 황량했지만 .. 2024. 12. 27.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