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 중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낮춤으로써 당신은 우리 가운데 계심을, 세상을 구하는 건 바로 너, 바로 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걸 가르치셨다. 우리가 서로에게 구인(救人)이 되지 못한다면 구세주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을 것이다.”
“김장도 끝난 들판은 황량했지만 파밭은 푸르렀고, 가상이만 살얼음이 진 시냇물은 햇빛을 잘게 부수며 유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양지짝에는 봄을 착각한 건지 얼어붙었다가 다시 살아난 건지 쟁이나 씀바귀 비슷한 이파리들이 군데군데 검푸르게 깔려 있었다. 들판의 모든 것들, 시방 죽어 있지만 곧 살아날 것들, 아직 살아 있지만 곧 죽을 것들, 사소한 것들 속에 깃든 계절의 엄혹한 순환,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 박완서,「호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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