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94 가을바람의 노래 가을바람의 노래 추성부(秋聲賦) / 구양수(歐陽脩,1007~1072)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책을 읽을 때 어떤 소리가 서남쪽에서 들려왔다. 휘둥그레 듣고선 말하였다. “기이하구나. 처음에 쏴! 쏴! 초목을 흔들며 불어오더니 홀연 솟구쳐 올랐다 철커덩 내려앉아 마치 파도가 밤에 놀라며 비바람이 갑작스레 닥쳐오는 듯하였다. 사물에 부딪쳐 쟁그랑거리면서 쇠가 진동하는 듯하기도 하고 적병에게 내달리는 병사가 재갈을 물고 질주하며 호령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의 발소리만 들리는 듯하기도 하다.” 내가 동자에게 말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고? 나가서 보거라.” 동자가 와서 말했다. “별과 달은 환하게 빛나고 밝은 은하수가 하늘을 길게 흘러가고 사방에 인적은 고요한데 나무 사이에서 무슨.. 2026. 10. 13.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내 여자친구는 비만입니다. 온 세상이 고통이라서 허기에 늘 집니다. 우리는 방이 두 개고 화장실이 하나인 집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목이 죄다 늘어난 티셔츠를 접다가 포근한 보리수보다 헤픈 바다를 사랑해서 단맛보다 짠맛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은 염주보다 동그란데 모든 일이 헛되고 무상해서 새로 돋아날 수가 없고 그래서 다이어트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박자보다는 삶의 입자를 쪼개느라 의미 없는 댄스가 싫다고 합니다. 우리는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홉 번 태어난다는 포동한 고양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생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로는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어서 미.. 2026. 10. 12.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 추기(鄒忌)의 키는 여덟 자가 넘었고 신체는 늘씬하고 화려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의관을 갖추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나와 성북(城北)에 사는 서공(徐公) 중 누가 더 미남이오?” 그의 처가 말하였다. “당신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서공이 어찌 감히 당신에게 미치겠어요!” 성북의 서공은 제나라에서 잘 생기기로 유명한 자였다. 추기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이번에는 다시 첩에게 물어보았다. “나와 서공 중에 누가 더 미남이오?” 첩이 말하였다. “서공이 어찌 당신에게 미치겠어요!” 이튿날 어떤 손님이 와서 추기와 좌담을 하고 있었다. 추기가 그 손님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 중에 누가 더 미남인가?” 손님이 말하였다. “서공은 당신의 아름다움만 못합니다.” 그 다음 날.. 2026. 9. 30.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 자명自銘이홍준(李弘準, 조선전기) 旣無才 又無德 人而已 生無爵 死無名 魂而已憂樂空 毁譽息 土而已 재주 없는데 덕 또한 없으니 사람일 뿐이다. 태어나 벼슬 없고 죽어서 이름 없으니 혼일뿐이다.근심과 즐거움 사라지고 모욕과 명예 없어지니 흙일뿐이다. ✺ 사람의 생이란 이런 것이다. 재주 있는 사람이 몇이고 덕이 뛰어난 사람이 몇인가? 학식 있고 종교에 심취해 있어도 작은 일에 얼굴이 붉어지며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다. 살아서 높은 직위에 오르고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란 쉽지 않다. 죽어서 몸은 썩어 없어지고 혼만 남는다. 근심과 즐거움이란 덧없다. 모욕이나 명예도 부질없기는 같다.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죽음 뒤에는 혼과 백이 나뉜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 점차 사라지며 천지운.. 2026. 9. 28. 기억이 약속이 되는 날까지 기억이 약속이 되는 날까지 2026년 8월 20일(목) 저녁 7시 30분, 서울시의회 본관 1층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그리스도인 월례기도회에 참석했다. 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기도 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십시오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내가 영원토록 주님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습니다. 인도자의 예배의 부름에 모임에 참석한 40여 명의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 있던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 이 시간 당신께 내려놓겠습니다.”라는 .. 2026. 8. 21. 『쥬디 할머니』 박완서 박완서 10편의 단편소설 지난 10주 동안 문학동네에서 펴낸 박완서 단편집 『쥬디 할머니』를 재밌게 읽었다. 박완서 작가 타계 15주기를 맞아 31명의 한국 대표 소설가가 박완서의 총 97편의 단편소설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공통으로 뽑은 10편의 소설이다. 소설제목과 주관적인 핵심내용을 한 줄로 정리했다. ❶ 쥬디 할머니쥬디 할머니의 숨겨진 정체, 그 허무한 반전❷ 애 보기기 쉽다고?세상에서 가장 고된 노동, 독박 육아의 현실❸ 공항에서 만난 사람얼마나 고독하고 얼토당토않은 짓인가.❹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할머니도 여자다. 여성이라는 생명력.❺ 재이산(再離散)두 번 찢겨진 실향민의 비극❻ 해산 바가지생명의 고귀함을 깨우는 바가지❼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자식을 잃은 엄마, 그 지독한.. 2026. 7. 7.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다 똑같은 사랑이다 1.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이 15만 부를 넘기며 창작과 비평사에서 빨간색 표지의 리커버 양장본을 발매했습니다. 한 번 더 읽고 싶어서 구매하여 보니 초판 40쇄. 그야말로 소설계의 메가히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박상영 작가가 국내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이유도 있지만 이 책에 열광한 핵심 독자층이 소수자 인권, 다양성, 페미니즘 등의 가치에 가장 개방적이고 민감한 세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우정과 연대에 열광하며 자발적으로 리뷰와 추천을 이어갔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아마도 2022년 세계적 권위의 부커상(Booke.. 2026. 7. 1. 노루망 40미터 노루망 40미터 노루망 울타리는 밭작물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이다. 노루나 고라니가 넘지 못하도록 둘러치는 그물형 울타리라고 보면 된다. 작년에는 텃밭 옆 7평 남짓한 밭을 윗집에서 빌려 쓰느라 경계선을 조금 욕심내어 30미터쯤 넓게 둘러놓았었다. 작년에 집을 둘러싼 경계 측량을 마치고 등기된 대지의 선을 따라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올해는 더 이상 밭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 계산을 해보니 노루망 길이가 오히려 10미터가 늘어나 총 40미터가 되었다.형편이 넉넉했다면 녹색 휀스를 둘렀을지도 모르지만 작년에 쓰던 것을 재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돈도 줄이고 시간도 절약하고 나쁠 것 없었다. 토요일 오후, 귀한 일꾼 아들을 다시 불러냈다. 일당만 잘 쳐주면 군말 없이 따라 나오니 다행이었다.낮 .. 2026. 4. 28. 나무 울타리 만들기 나무 울타리 만들기 시골집 텃밭은 앞 도로와 구거를 마주하고 있다. 구거가 나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긴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좀 그렇다. 눈에 보이는 근사한 울타리 하나쯤은 있어야 안심이 된다. 길이는 대략 12미터. 그동안은 사철나무와 오가피나무가 듬성듬성 이 빠진 치아처럼 대충 울타리인 척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가지를 치고 오래된 철조망과 철사선을 걷어냈다. 갑자기 휑해졌다. 비워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뿌듯함보다 막막함이 먼저 들어섰다. 뭘로 울타리를 만들어야 하나? 처음에는 저스틴 블록 같은 고급 디자인 블록을 떠올렸다. 사진으로 보면 그렇게 우아하고 근사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가격을 보는 순간 마음을 바로 접었다. 블록 하나에 만 원이 넘는다. 울타리가 아니라.. 2026. 4. 28. 이전 1 2 3 4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