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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깨달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다 구라야

by 하늘밑 2024. 10. 17.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구라라면 다 구라야. 교회 다니는 사람은 듣기 거북할지도 몰라. 뭐 그들은 늘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느라 밖으로 나오는 걸 두려워하니 이상할 것도 없지. 요즘 교회보면 아직도 16세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21세기에 사는 척해. 안타까울 뿐이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생각나는 대로 해 보려고 해. 교회 밖 사람들에겐 상식적인 이야기가 교회만 들어가면 무슨 변방의 목소리가 되어버리니 개탄할 노릇이지.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잊혀지길 원했으나 제자들은 예수를 잊지 못했고 다시 예수를 살려냈어. 그걸 부활이라고 해. 예수는 제자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다시 살아났어, 희망이 없던 시대에 예수는 희망의 원천이 되기에 충분했거든. 그들은 온갖 근거를 구약에서 찾아 복음서를 완성했지. 사실 구약에는 부활이란 말이 없어. 기원 전후를 생각하면 아직도 신들의 시대야.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을거야. 하기야 로마 황제도 신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서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냈어. 신의 한수였지. 그 진리를 이방으로 전했고, 로마는 기독교를 공인해 제국의 종교로 만들어 세계로 전파했지.
 
예수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늘 말하고 다녔어. 메시아의 삶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기도 했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눈으로 보고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큰 아이러니야. 그들이 그랬다면 우리라고 다를까? 아마 예수가 요즘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없을거야. 예수는 교회에서 문전박대나 당했겠지. 부활한 예수가 빌라도나 자신을 핍박했던 산헤드린공회에 짠하고 나타났어도 지난 수세기의 부활논쟁은 끝났을 거야. 그 쉬운 걸 예수는 하지 않았어. 암튼 예수의 이야기는 바울이 아니라 마가의 손끝에서 완성되었고 그런걸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르지.
 
기독교의 정의를 검색해 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종교”라고 되어있네. 엄격한 의미에서 예수는 유대교인이었고 스스로 어떠한 종교도 창시하지 않았어. 그냥 하나님나라 운동을 했을 뿐이지. 예수는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인식을 잘 내보이지 않았어. 유대의 독립에도 관심이 없었고. 늘 자신의 행위를 유대인들의 율법과 관계 맺는 것으로 제한해서 설명을 했지. 말도 조금은 촌스러운 아람어를 사용했어. 그러나 보니 예수가 글을 몰랐다는 설도 나왔어. 예수는 유대땅을 벗어나서 산 적이 없었으니 그가 믿는 세상은 오로지 유대 세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종교개혁의 선두였던 마틴루터는 왜 예수의 육성이 담겨있는 복음서가 아닌 바울의 서신서에서 깨달음을 얻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예수의 말은 바울의 말보다 촌스럽고 사변적이지 않았던 거야.  로마가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희랍적 사고의 틀로 구현해 냈기 때문이었지. 바울이 쓰던 언어는 예수의 말보다 엄청 고급졌을 것이고, 기본이 편지라는 매우 고차원적인 텍스트를 이용했기 때문에 논리적일 수 밖에 없었어. 마틴루터는 예수의 이야기보다는 논증적인 바울의 글에 더 천착했고 그렇게 해서 이신칭의라는 종교개혁의 틀이 완성되었어.
 
로마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적어도 소크라테스 정도는 되는 인물이라고 받아들였을거야.^^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예수는 예수 자체가 아니라 바울을 통해 보는 예수야. 동양의 고전인 도덕경은 노자가 아니라 왕필의 주가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고, 공자의 논어는 주자의 해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운 것과 같아.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등의 서신서에 쓴 글을 예수가 직접 한 말 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걸 보면 바울의 말을 예수의 말과 동일시 하고 있는게 분명해. 바울이 혹시 그러길 원했을 수도 있지. 바울의 말이 예수의 말이 되어야 개신교는 살아날 수 있었을 테니. 성경 잘 보면 예수의 말은 빨간색으로 표시해놨어. 구별은 해 놨지만 온전히 다는 아니라는게 성경연구자들의 말이기도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그 흔한 비유 하나도 인용하지 않았어. 너무 박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바울이라면 예수의 전기 정도는 하나 썼을 것 같다. 물론 바울이 그랬다면 마가보다 훨씬 더 잘 썼겠지.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만 완전히 꽂히고 만 것이지. 속된 말고 찐방의 앙꼬가 부활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만 빼먹고 만 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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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보다 바울의 서신서가 시기적으로 앞서니 마가와 같은 복음서의 저자들도 바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거야. 바울과 같은 논리적인 서신서를 쓰는 건 넘사벽이었을 것이고 그 시대 가장 보편적인 서사양식인 이야기로 쓴 것이 복음서야. 요즘으로 보면 복음서는 판소리 춘향가처럼 민간에서 널리 읽히는 양식이었다는 거지. 아마 그 시대에 마가복음을 글로 읽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을걸? 대부분 이야기는 구전을 빌어 전파되었을거야. 복음서에 원본이 없고 필사본만 남아 있는 것도 그 이유지. 자꾸 구라치느라 횡설수설하니 각설하고 여기서 드는 의문!!
 
교회는 바울을 알자!! 하지 않고 늘 예수를 힘써 알자!!라고 하지. 그렇다면 바울을 통해야 예수를 더 잘 볼 수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리지널 예수는 어찌 보면 바울을 걷어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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