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유민시대라고 한다. 사람들은 불당이나 성당, 그리고 교회들을 옮겨 다니거나 아예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떠돌고 있다. 종교의 부조리함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코로나 사태 이후로 교회 나가는 기독교 인구는 급감하고 있다. 가나안 성도는 안나가 성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예 교회의 울타리를 떠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MZ세대들에게 교회는 더 이상 매력이 없다. 교회는 동성혼이나 차별금지법에는 세상이 망할 것처럼 악다구니처럼 덤비지만 정작 교회 세습이나 목회자들의 성적 탈선, 맘몬주의에 물든 자신들의 악행에는 각성도 없고 회개도 없다.
우리가 아는 종교에 진리가 있기나 했던 건지^^갖가지 이념들이 난무하고 어지럽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자기부인과 헌신, 현세의 고통을 감내하라는 기독교의 감언(甘言)은 너무나 이성적이지 않다.
인생의 목표는 편안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겠어 말하는 젊은 세대에게 교회는 너희는 죄인이야 외칠 뿐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교회에 와서 예배의 황홀감에 빠지는 것은 그저 가스라이팅이고 자기최면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갇혀서 종교가 강요하는 관점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기엔 세상은 진리와 이성에 대해 회의만 가득하다.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던 것들은 알고 보면 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어떤 종류의 의무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쉽게 결정하지 않는다. 진리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 확고한 진리라고 믿는 순간 그건 권력이 되고 폭력이 된다. 이성의 과욕과 인간의 우월함을 버리자. 진리란 이성으로 찾는 것이 아니다. 신앙 또한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확고부동한 진리란 없다.
유럽역사를 보면 30년전쟁에서 구교와 신교가 대립하며 무려 800만명이 죽었다. 그것도 신의 이름과 정의로. 오죽하면 <기독교 죄악사>란 책이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뭐든 모르겠다가 답이다. 이성과 지식에 대해 겸허하고 진리에 대해 무지함을 스스로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남을 죽이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지 말고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이성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종교의 틀을 벗어나 건전한 상식과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평안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게 잘사는 삶이라고 누가 부정하겠는가? 어찌보면 진리가 여기있다 외치는 곳은 다 사기치는 곳이고 진리를 팔아 장사하는 곳이다.
진리는 스스로 고행의 길에서 만나는 길밖에 없다. 그것도 자기만의 정의와 방식대로. 편안한 교회 의자에 앉아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교회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와 중세,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대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그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는 비유에서 어린아이와 겨자씨, 백합, 참새 등 어리석고 꾸밈없고 근심 걱정 없는 존재들, 어찌보면 자연만을 길잡이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을 본보기로 삼았다. 기독교는 원래 바탕이 이성적이고 세련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16세기 에라스무스는 이미 그런 걸 알아서 <우신예찬> 같은 책을 남겼고 토마스모어는 타락한 현실과 인간이 가진 무책임한 이상주의를 <유토피아>에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무엇이 진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에 대한 진지함과 절박함. 사실 이미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다 고민했던 것들이지만 다시 수학문제 꺼내어 풀듯 고민해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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