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24년 12월 24일부터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5주년을 기념하는 ‘안중근 書(서)’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전시된 18점의 유묵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獨立(독립)’이었다. 유묵은 전시실 중앙, 별도의 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유묵이 보였다. 간결한 두 글자의 필체에서 웅혼한 힘이 느껴졌다. 글씨 왼쪽에는 약지가 절단된 안의사의 손바닥 도장이 선명했다. ‘獨立(독립)’ 유묵은 뤼순(旅順)감옥 간수였던 시타라 마사오(設樂正雄)씨가 안의사에게 받은 후 그의 후손인 시타라 마사즈미(設楽正純)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류코쿠대학에 기탁한 것이다. 사형을 앞둔 일반사람이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붓조차 잡을 수 없었을 것인데 안의사는 차분한 마음으로 붓을 잡고 담대하게 글씨를 쓴 것으로 보인다. 유묵 중 단연 안의사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獨立(독립)’, 2음절의 유묵일 것이다.
안의사는 사형이 확정된 1910년 2월 14일부터 사형언도를 받은 3월 26일까지 40여 일 동안 여순감옥에 머물면서 약 200점의 유묵 작품을 남겼다. 그는 이 시기에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집필 작업까지 겸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 즉 형 집행일이 정해지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감옥에서 이런 작업을 해낸 것이다. 「동양평화론」은 미처 끝을 맺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안의사가 남긴 유묵 200여 점 중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62점이다. 이 중 국가보물로 지정된 것이 25점이다. 硯池(연지),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天地飜覆 志士慨嘆 大廈將傾 一木難支(천지번복 지사개탄 대하장경 일목난지), 人心惟危道心惟徵(인심유위도심유미)는 기록은 있으나 실물 또는 사진본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登高自卑行遠自邇(등고자비 행원자이)는 그 진위(眞僞)가 불투명하다. 나머지 유묵은 한국, 일본, 중국에 산재되어 있다.
유묵에는 왼쪽 중간 부분부터 아래 부분까지 작은 글씨로 ‘庚戌二月 (또는 三月), 於旅順監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친필서명이 있다. 유묵 왼쪽에는 정천동맹(단지동맹)으로 약지가 절단된 왼손이 압인(壓印)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묵에는 손가락이 위를 향하도록 바르게 찍혀있으나, 작품에 따라 그 방향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안의사가 많은 유묵을 쓰게 된 배경은 그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때 법원과 감옥의 관리들, 내가 쓴 글을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며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어주고는 글씨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면서,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 「안응칠 역사」
안의사의 유묵은 일본 정부에 의해 시공간이 단절당한 상황에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였다. 유묵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의사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관계를 맺어온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 입장에서 조국의 원훈(元勳)을 죽인 사람에게 글씨 한 점을 청하여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단순한 호기였을까, 아니면 일발의 존경심이 발동한 연유였을까, 사형수에게 글쓰기를 부탁하기가 여간해서는 힘들었을 듯한데 일본인들은 그렇게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안중근의 유묵에서 감화를 얻어 그를 새롭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덕분에 우리도 안의사가 남긴 글을 읽고 그를 기억할 수 있으니 다행이리라.
안중근의 유묵은 대략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유교의 도덕과 덕목의 실천을 강조한 유묵. 둘째, 일제의 대한침략과 동양평화를 강조한 유묵. 셋째, 지사의 의기와 우국충정을 읊은 유묵. 넷째, 애국사상에 입각하여 국가의 안위와 군인의 의무를 읊은 유묵. 다섯째, 유명한 한시를 인용한 유묵. 여섯째,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유묵. 일곱째, 개인적인 당호로 써준 유묵. 여덟째, 종교관련 천주교를 언급한 유묵이다. 이중 유교의 도덕과 실천을 강조한 유묵들이 안중근의 유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안중근의 유묵
五老峯爲筆(오로봉위필) / 靑天一丈紙(청천일장지)
三湘作硯池(삼상작연지) / 寫我腹中詩(사아복중시)
오로봉을 붓으로 삼고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푸른 하늘을 한 장 종이 삼아 마음에 담긴 시를 쓰련다.
靑草塘(청초당) 파란 풀이 돋아난 못
雲齋(운재) 구름이 머무는 집
天地作父母 日月爲明燭(천지작부모 일월위명촉)
하늘과 땅을 부모로 삼고 해와 달을 밝은 촛불로 삼는다.
貧與賤人之所惡者也(빈여천인지소오자야)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喫蔬飮水 藥在其中(끽소음수 낙재기중)
나물 먹고 물마시니 그 속에 낙이 있네.
貧而無諂 富而無驕(빈이무첨 부이무교)
가난하다고 아첨하지 말고 부유하다고 교만하지 말라.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
궂은 옷 궂은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仁智堂(인지당)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집
忍耐(인내)
참고 견딞
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
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다.
自愛室(자애실)
자기를 스스로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는 집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간다.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생긴다.
博學於文 約之以禮(박학어문 약지이례)
학문을 폭넓게 익히고 익힌 것을 예로 지켜 가라.
白日莫虛渡 靑春不再來(백일막허도 청춘부재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황금백만이불여일교자)
황금 백만 냥도 한 자녀 가르치는 것에 견줄 것이 못된다.
敏而妤學 不恥下問(민이호학 불치하문)
총명하여 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庸工難用連抱奇材(용공난용연포기재)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人無遠慮 難成大業(인무원려 난성대업)
사람이 멀리까지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
눈보라 친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人無遠慮必有近憂(인무원려필유근우)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필히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
思君千里(사군천리) / 以表寸誠(이표촌성)
望眼欲穿(망안욕천) / 幸勿負情(행물부정)
임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듯 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나 이 정을 버리지 마소서.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애태운다.
臥病人事絶 此君萬里行(와병인사절 차군만리행)
河橋不相送 江樹遠含情(하교부상송 강수원함)
나는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는 만 리길을 떠나는가
다릿못에 같이 나가 보낼 길 없고 강 언덕 나무숲에 정만 어렸네.
獨立(독립) 대한의 독립
見利思義見危授命(견리사의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무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志士仁人殺身成仁(지사인인살신성인)
지사와 어진 사람은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第一江山(제일강산) 한반도의 삼천리 금수강산
山不高而秀麗 水不深而澄淸 地不廣而平坦 林不大而茂盛
(산불고이수려 수불심이징청 지불광이평탄 임불대이무성)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청결하고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고 숲은 크지 않으나 무성하다.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흩어졌으나 산(山)과 강(江)은 남아있다.
劒山刀水慘雲難息(검산도수참운난식)
검이 산을 이루고 그 칼끝이 처참하여 구름조차 쉬기가 어렵다.
人心惟危道心惟徵(인심유위도심유미)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하고 도의 마음은 오직 미묘하다
弱肉强食 風塵時代(약육강식 풍진시대)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가 침략하는 어지러운 시대.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년년세세화상사세세년년인부동)
뜻: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같지 않네.
東洋大勢思杳玄(동양대세사묘현) / 有志男兒豈安眠(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화국미성유강개) / 政略不改眞可憐(정략불개진가련)
동양대세 생각하니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가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루니 이리도 강개해지누나 침략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도다.
年年點檢人間事惟有東風不世情(연년점검인사유유동풍불세정)
해마다 세상일 헤아려보니 다만 봄바람만이 세태를 따르지 않네
言語無非菩薩 手段擧皆虎狼(언어무비보살 수단거개호랑)
말은 보살 아닌 것이 없으나 쓰는 수단은 거의가 호랑이 같이 무자비하다.
天地飜覆 志士慨嘆 大廈將傾 一木難支(천지번복 지사개탄 대하장경 일목난지)
천지가 뒤집혀 의사가 개탄하네 큰 집이 장차 기울어지니 한 나무로 지탱하기 어려우리.
孤莫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동양을 보전하려면 먼저 정략을 고쳐야 한다.
日出露消兮 正合運理 (일출로소혜 정합운리)
日盈必庂兮 不覺其兆 (일영필측혜 불각기조)
해가 뜨면 이슬이 사라지나니 천지의 이치에 부합되도다.
해가 차면 반드시 기우니 그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 도다.
不仁者不可以久處約(불인자불가이구처약)
인(仁)의 도리를 지키는 마음가짐이 없는 자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 결국은 타락하게 된다.
臨水羨魚不如退結網(임수선어불여퇴결망)
물에 가서 물고기를 갖고자 욕심내는 것은 물러나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
長歎一聲 先弔日本(장탄일성 선조일본)
큰 탄식으로 먼저 일본의 멸망을 조문한다.
白忍堂中有泰和(백인당중유태화)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日通淸話公(일통청화공)
일본말과 청국말을 소통시키는 공
人類社會 代表重任(인류사회 대표중임)
인류 사회를 대표할 위치에 있는 일본은 무거운 책임을 갖는다.
通情明白光照世界(통정명백광조세계)
정이 명백하게 통하는 빛 밝은 세계
日韓交誼善作紹介(일한교의선작소개)
일본과 한국의 우의를 소통으로 증진한다.
澹泊明志 寧靜致遠(담박명지 영정치원)
담백한 밝은 뜻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오래 전수된다.
百世淸風(백세청풍)
백 년의 세기동안 푸른 바람이 분다.
害我伊藤不復活生我東洋平和和本
(해아이등불복활생아동양평화화본)
나는 이토를 죽이고 다시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나는 동양 평화의 근본을 살고자 한다.
極樂(극락) 지극한 즐거움, 천국
天堂之福永遠之樂(천당지복영원지락)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敬天(경천) 하늘을 공경하다.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 성사재천)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인데,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
硯池(연지)
벼루 앞쪽의 오목한 곳을 표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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