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봤어. 리처드 도킨스말대로 라면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무신론을 가장 잘 포장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야.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에 깊이 있게 다가갔던 인물이야. 오죽하면 독일시인 노발리스는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을까?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을 부정하지 않았고,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했어.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유한한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정서와 욕구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설명했지. 신은 초월이 아니라 내재이며 그렇기에 신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삶, 감정, 마음, 주변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지. 스피노자가 무신론자였다면 그토록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옹호했는지 설명하기 힘들어.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신과 세계를 뒤섞어 놔서 세상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해. 스피노자는 세상 모든 것이 신의 현현이라고 봤어. 스피노자는 모든 실체에 대해 긍정했고 이런 자기 생각을 기하학적인 질서에 따라 논증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수학적 방법이야말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여러 상상적 믿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헤겔같은 관념론자들이 보기에도 스피노자를 중세를 뛰어 넘는 근대철학의 출발이라는 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어. 스피노자가 믿었던 신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logos)와 가장 근거리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우주를 창조한 광대한 신이 인간의 작은 슬픔에 눈물을 떨구는 모습은 그리스나 로마신화에 나오는 의인화된 신과 뭐가 다른지 때론 의문이 생긴다. ‘나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이라고 하면서 감격스러워하는 기독교인에게 스피노자는 ‘신은 당신의 고통도 아시지만 흩날리는 나무의 외로움도, 오늘 목숨을 다하는 하루살이의 고통도 다 이해하신다’라고 말할 것 같다. 세계를 창조한 신이 아니라 세계가 자체가 신이 샘이지. 솔직히 말해 신의 본성이 깃들인 세상에 둘러싸여 사는 스피노자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삶에 대해서 불성실하고 자연과 인간을 기만하며 살 수 있겠어.
스피노자는 미신을 경계했다. 우주자연의 합리적 질서를 이성적으로 파악해야 미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지. 멋대로 신을 상상하고 복종을 맹세하면서 신앙은 야만으로 변하고 정치화하면서 타락의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봤어. 신과 교회에 대한 공포와 예속을 당연시하던 시대, 스피노자는 거기에 저항하면서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나 시대와 불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성의 합리성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 자유를 꿈꿨다. 나 외의 다른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도 나와 마찬가지로 신의 속성이요 신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그러니 무엇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1982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설사 우리가 그것을 잃는다 해도, 슬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다 해도, 시기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다. 두려움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영혼의 동요가 조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사라질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기쁨으로 영혼을 살찌운다. 어떤 슬픔도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서, 온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한다.” 스피노자 『지성개선론』 9~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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