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해 질 녘 한강둔치에 갔다가 술에 취했는지 강물에 대고 울부짖는 여인을 목격했다. 30대쯤 돼 보였다. 목이 쉴 것 같은 울음은 웃음이 되고 분노가 되고 외침과 한탄이 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실연을 당한 것인지 실직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쳐버리고 싶은 데 미쳐지지 않은 것이 괴로워 그랬을 수도 있다. 강물에 몸을 던질까 걱정이 되어 계속 응시만 하다가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서야 뒤돌아 섰다. 실컷 강물과 밤하늘에 욕과 저주를 퍼부었으니 이제 좀 속이 후련해졌으려나. 여인은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않았다. 여인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저며 오는 삶의 무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싶었다. 어쩌면 내가 한강을 가끔씩 찾는 이유와 같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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