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 A씨는 신실한 아내의 권유로 오랜만에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때는 새벽 5시, 먹장을 깔아 놓은 듯 고요한 도로의 소실점 끝에서 검푸른 하늘 멀리 계명성이 반짝였다. 순간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로 시작하는 찬송가 가사가 떠올랐다. A씨는 삼일운동 미명에 탑골공원 향하는 듯한 설레는 행보로 예배당 문에 들어섰다.
예배당은 어둠침침했고 제단 위에 켜놓은 LED 십자가가 무가의 촛불마냥 옅은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A씨의 머릿속에 핏빛으로 등을 켜놓은 정육점 냉장고가 떠올랐다. 나이 들며 취향이 변해서인가? 예배당의 분위기도 그렇고 어릴 때 편하게 느꼈던 목제의자의 팔걸이와 도톰한 쿠션을 넣은 장의자마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강대상 옆에서 서둘러 나왔는지 뒷머리가 살짝 눌린 부목사가 등장하여 찬송가를 낭창한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일부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였다. 본문만 반복해서 읽었으면 좋으련만 목사는 큐티 해설집을 참고했는지 밋밋하고 고답스런 용어를 나열하며 성경본문을 무미건조하게 설명하더니 급기야 클라이맥스에서는 자신이 금쪽이 아이를 힘들게 키우며 깨달은 내용이라며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자녀양육도 애통할 일이 많으니 그럴 법도 하겠다 싶었지만 설교를 듣는 A씨는 정작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목사의 날카로운 바지 깃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마무리 기도는 엘리야가 비를 부르듯 너무나 비장하여 숨이 막혔다.
본격적인 개인기도시간이 이어졌다. A씨도 이왕 교회에 왔으니 자신을 좀 돌아볼까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볼륨 조절에 실패했는지 배경음악으로 틀어주는 복음성가 가락이 귓전을 때렸다. A씨는 속으로 언제부터 기도할 때 배경음악을 틀어놓는 관행이 생겼을까? 의문이 생겼다. 몰입을 방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의자 곳곳에서 기도의 괴성이 쏟아져 나와 배경음악과 기싸움을 하는지 점점 커져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스트레스를 이렇게도 푸는구나 싶었다.
A씨의 뒷자리에서 평소 알던 집사님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된 기도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 기복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어차피 함께 사는 사회는 제로섬 게임과 같아 누가 잘 되면 누구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소원을 다 들어주면 누군가의 인생은 폭망할까 두려웠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아예 귀를 닫거나 침묵할 것이다. "~해주시옵소서", "믿셥니다~"라는 반강제적인 요청이 협박처럼 들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하지 않았지 여기가 교회당인가 싶었다. 순간 무당집이 생각난 A씨는 이건 아니다 싶어 볼을 부르르 떨며 생각을 다잡았다. 하긴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인들의 관행이 새벽기도회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A씨를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예배 시작 후 피아노 반주를 했던 여집사님의 행보였다. 단아한 드레스를 입고 강대상 바로 앞에 무릎을 꿇던 여집사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손을 좌우로 뻗치고 속칭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오직 신만이 안다는 하늘의 언어라지만 A씨가 보기에는 황홀한 자아도취 끝에 나오는 의미없는 의성어였다. 동작은 한층 고양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빙글빙글 부채춤추듯 도는 지경에 이르렀다. 검은 어둠이 귀신처럼 펄럭였다.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웅얼거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신내림 같은 언어. 저렇게 기도하며 카타르시스와 함께 신과의 친밀감을 느끼는 것일까? 저런 기도는 자기 집 안방에서나 좀 하지. 누가 안 보고 있어도 저럴까 싶어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A씨는 중얼거렸다. 토할 것 같다.
A씨는 새벽기도란 본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한 것처럼 철저하게 고독한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신의 현전 앞에 침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삶이 결단이 나오고 회개가 나오고,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 이기심과 성정(性情)을 거슬려야 하기에 한숨과 침묵이 섞이고,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에 신의 긍휼함을 구하는 시간이 아니었던가? 신과 나 사이에 모든 것을 없애야 하는 시간이 아니었던가?
새벽기도회가 끝났다. A씨가 으스스한 기운에 식은땀을 닦아내는 동안 기도의 황홀함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은 해 같이 밝은 미소를 머금고 서로에게 문안하며 교회 밖으로 사라졌다. 은혜받는 것이 분명했다. A씨의 시간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과 서로 어긋난 것 같았다. A씨는 교회 예배당에 남아 덩그러니 달려있는 십자가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십자가 조명이 퓨즈가 나갔는지 파르르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열린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젖은 수건처럼 축축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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