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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깨달음

어느 기독인 A씨의 고백

by 하늘밑 2024. 10. 22.

교회에서 집사로 불리는 A씨는 며칠 전 교회 구역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구역모임은 두란노에서 발행한 ‘생명의 말씀’이라는 큐티교재의 나눔식 소그룹 토의 자료로 묵상 나눔을 하였습니다. A씨는 큐티교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경을 맥락에 맞게 쭉 읽어나가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러저러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적응과 나눔 차례가 되었습니다. 구역장이 생명의 말씀을 들고  두 가지 질문을 낭랑하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1. 하나님과의 첫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나누어 보세요. 처음 사랑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2. 내 삶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실 만한 죄악 된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구역멤버들은 늘 예상할 수 있는 답을 했습니다. 초등학교시절 아니면 중고등학교 시절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후 그때의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여러 이유로 지금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마음이 뜨거워 교회예배를 너무 기쁘게 드렸는데 지금은 하는 일이 바빠 그렇지 못하고 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힘들다, 교회 내에서 자꾸 남을 미워하려는 마음이 있다 등등 첫사랑과 죄악 된 모습에서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에피소드와 함께 오갔습니다.
 
A씨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명의 말씀식 질문도 그렇고 무슨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가끔 출구 없는 이야기를 해 온 터라 일부 구역원은 A씨의 말을 조심스럽게  경청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래는 A씨의 요지입니다. A씨는 말하고 뭘 그걸 그리 말했을까? 입이 방정이라고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하면 될 일인 것을 하며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기뻤던 때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과 밤을 새우며 복음을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미전도 족속의 복음화를 위해 세계지도에 손을 얹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대학 캠퍼스를 돌며 땅 밟기, 영적전투를 한 적도 있고 선교여행을 가기도 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때를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감정적이었고 세상은 물론 나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아집이 많았고 복음의 복자도 모른 채  거만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복음의 열정은 저를 좁은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지금은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마음이 전보다 훨씬 편해졌습니다. 인생사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성경을 더 친근하게 읽게 되었고 예수그리스도를 좀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타 종교와 타문화를 이해하는 마음도 넓어졌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는 느낌보다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향해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는 격정은 없으나 시대의 징후와 예수의 나지막한 음성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사랑을 유지하였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두 번째 저는 저의 죄악된 본성을 계속 돌아보고는 있으나 당신의 죄악 된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는 당황스럽습니다. 저의 죄를 자백하라고 하면 밤을 새도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깨알 같은 은밀한 죄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죄에 대해 어떤 생각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한 번도 그들에게 네 죄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가난한 병자, 버림받은 여인, 세리 등을 향해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예수님이 최후로 한 말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요한복음8장)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베드로나 삭개오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고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정죄하기보다 자신의 죄에서 놓임을 얻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죄를 지어 병에 걸렸다는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치유의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음란한 마음만 품어도 죄인이라 정죄하면 누가 자유롭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정죄하고 고백하는 것보다 주님의 백성으로 사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죄책감과 좌절에 빠져있던 사마리아여인이 예수를 만난 후 기뻐하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간 것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기쁨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것보다 훨씬 값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죄악에 빠진 옛사람은 그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죄들 예를 들어 성경을 보지 않은 일, 다투고 싸운 일, 누구를 미워하고 거짓말한 일 등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면 고백할 것도 없이 옳은 일로 그냥 그렇게 하면 됩니다. 이런 고백들을 하면 죄에 대한 민감성은 높아지겠지만 예수님이 정죄하지 않은 간음한 여인만 하겠습니까? 과장해서 간음한 여인에게 네 죄가 무엇이냐고 묻겠습니까? 평일 즐겁게 생활하다가 주일예배에 나와 알고도 모르고도 지은 죄를 떠올리며 회개하는 일은 나름 자기 성찰에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 순간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기보다 바로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뵙고 죄를 깨닫는 순간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되돌릴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한 것처럼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갚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깜냥만큼 했습니다. 네 죄가 무엇인지 고백하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죄를 기회로 삼는 사람들은 예외입니다. 그릇된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대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사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징계를 받고 정신과 물질측면의 변상과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이 용서하셨으니 그 누가 나를 정죄하리오’ 해서는 안 됩니다. 죄악 된 모습을 나누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행동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당신의 죄악 된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A씨의 형형한 눈빛에 주변이 마가의 다락방처럼 빛났습니다. 
 

청계천 복개공사(1965.08.17) 정부기록 사진집. 멀리 명동성당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