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과 같다.(롬 10:9)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바울은 이를 성령에 의해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에스겔의 환상과 연결하고, 죽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이삭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도움과 연결하고, 더 올라가 아담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와 연결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현실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로마서 4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롬4:17)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롬4:24)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바울에게 예수는 ‘우리 범죄함 때문에 죽음에 내어주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롬4:25) 분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현실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 현실은 바뀐 것 없이 고통스럽고 악은 횡행하며 죄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의인이 현실에서 의롭게 살기가 쉽지 않다?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진’ 우리의 정체성은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빗대어 말하면 간판만 바꾸어 달았지 신장개업 준비가 안 된 음식점과 다를 바 없다. 의인이 되게 하였으면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 까지가 구원의 완성이 아닌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순은 바울이 극복해야 할 큰 화두였다. 바울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나(롬10:10) 그것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을 기다려야 한다. 썩을 몸을 벗고 썩지 않을 부활의 몸, 영적 몸으로 살아갈 것을 고대해야 한다.(고전15:52) 한 마디로 산 넘어 산이다. 그래서 바울은 ‘참고 기다리라’고 말한다. ‘주님과 함께 있을’ 미래를 소망하라는 것이다. 소망을 품은 긍정적 고통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고난과 환난은 소망의 장애물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는 촉매다. 더 기꺼이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라는 요청이다. 하지만 삶이 그리 쉬운가? 가장 깊은 신앙을 가졌다는 대형교회의 목사들도 ‘돈과 섹스와 권력’ 이라는 삼중파도에 여지없이 넘어지는 세상이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없다. 수시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님의 백성은 무늬만 거룩하지 세상의 자녀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기선포는 공허해 보이고 물질을 따라가는 교회의 모습은 이성을 상실한 집단최면의 집합소 같다. 하나님이 내려야 하는 정의의 심판은 코앞에 닥친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유보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야할 악인들은 철을 따라 열매를 잘도 맺고 있는 듯 하다.(시편1:3~4)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바울은 죄에 대해 죽은 의인들이 겪어야 하는 현실을 ‘잠시 받는 환난’이라 말한다. 더 참고 견디라는 말이다.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 되는 순간 구원에 합당한 자로 변화시키는 방법대신에 믿음을 지키는 험난한 여정과 선택의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값싼 구원은 없어 보인다. 바울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롬5:5)이라고 말한다. 이 사랑의 확신 속에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논리다. 믿는 자들은 낙담하거나 절망할 자유가 없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려는 노력의 결과 생겨나는 괴로움이니 더더욱 견뎌내야 한다. 이것이 희망고문이라면 이 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바울 자신은 어땠을까?
바울 또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고백하며 ‘내 자신이 마음으론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라고 말한다. 고민 상담하러 찾아가 교회의 목사님이 ‘나도 더하면 더했지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바울이 제시한 회심의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확신이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죄와 함께 살 것인가? 이 두 현실의 충돌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갈등한다. 그럼에도 이 갈등은 믿음을 불가능하게 하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자로 “간주하라[logizomai]”는 도전을 받는다. 말하자면 믿음은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택하는 숭고한 결단이다. 그리고 이 결단은 우리 삶의 행보, 즉 죄의 욕망을 따르는 몸의 행실을 죽이는 구체적인 삶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매 순간 우리의 영적 정체성에 합당한 삶의 방식은 바울이 예로 전투(롬13:12)와 달리기 경기 같다.(고전9:24~25) 성공과 안락함,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어야’(마24:42)하고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전1:3)를 이뤄내야 하는, 마치 서너 개를 동시에 켜 놓은 핸드폰 알람처럼 영적이고 도덕적인 각성에 민감하고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고전9:29) 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이러한 삶을 진심으로 지향하는가?
예수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제자들을 기댈 곳 없이 불의한 세상에게 농락당하는 억울한 ‘과부’에 비유하였다.(눅18:1~8)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본받아 세상이 제공하는 권력과 안락함을 거부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자발적인 과부의 삶을 살아갔다. 세상의 불의에 동화할 수 없는 대가는 핍박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한 마디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삶’(마5:10)이다. 그럼에도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내적인 확신, 세상이 조금은 선하게 변하고 있다는 희망, 사랑의 빚 이외에는 지지 않으려는 환대와 연합(롬13:8),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꿈꾸고 하나님의 임재를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지혜는 고난 중에 얻을 수 있는 은혜가 아닐까?
고난을 당하되 인내하고 ‘억울함’을 호소할지언정 결코 낙심하지 않는 것, 오히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지금 천국을 마음에 소유할 수 있는 믿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무한한 능력은 그런 믿음에서 시작한다.
'경계에서 읽는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각 잡고 읽기 (3) | 2024.10.21 |
---|---|
불의한 재물로 사귀는 친구 (2) | 2024.10.21 |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6) | 2024.10.17 |
한 말씀만 하소서 (feat. 가상칠언 이야기) (4) | 2024.10.17 |
엠마오 그리고 부활 (1) | 202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