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향기가 짙게 드리운 곳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꽃처럼 피어있기 마련이다. 이야기들은 덧없는 시절의 풍화를 견디면서 삶과 죽음, 의식의 경계와 세대의 명멸을 가릴 것 없이 영원을 향해 자신을 밀어붙인다. 예수의 이야기는 어떨까? 꼭 갈릴리와 가버나움을 돌아보고 예루살렘을 오가는 팔레스타인의 거친 모래길을 걷지 않아도 복음서를 펼치면 2000년 전 예수의 호흡을 살아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예수의 이야기가 영원 속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 그리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는 비유를 즐겨 사용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말한 75개 정도의 비유가 있는데 예수의 전체 대화 중 1/3을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예수는 비유를 익숙한 소재들을 활용하여 논쟁을 하거나 깊은 깨달음을 주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예수의 비유는 단순하고 명백하며 거침없어 보인다. 비유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비유들의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다.
마가복음 4장 1절부터 9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시작한다. 예수가 비유를 공식적으로 활용한 첫 번째 사례였다. 예수는 친히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했으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비유 중의 비유’로 ‘다른 모든 비유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쥐고 있는 중요한 비유’로 평가받게 되었다. 예수가 갈릴리 바닷가에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예수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배에 올라 배를 설교단 삼아 말씀을 전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막4:3~8 개역개정)
짧지만 강렬한 비유다. 로마 가톨릭 교회 신학자인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1934~ )은 예수의 이 비유가 삼중의 독특한 아람어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혔다. ①결실을 방해하는 세 가지 요소는 ‘새’, ‘해’, ‘가시’다. ②‘떨어졌다’를 세 번 반복한다. ③‘왔다’, ‘나왔다’, ‘떴다’ 그리고 ‘삼켰다’, ‘할퀴었다’, ‘말랐다’가 삼중으로 병행한다. ④ 세 종류의 밭과 세 종류의 실패가 삼중 구조를 이룬다. ⑤ 세 종류의 성공, 곧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세 종류의 실패를 보상하며 대칭을 이룬다. 크로싼의 분석이 맞다면 예수는 매우 탁월한 수사기법으로 비유를 말한 샘이다.
예수어록의 초기형태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 9장은 마가복음 보다 덜 세련되고 단출한 형식이다. 아마도 복음서 기자인 마가가 예수의 말씀을 찾아 증보하고 당시 유행하던 수사법을 더해 뜻이 명확해지도록 다듬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의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였을까? 예수는 비유하여 말하였을 뿐 어떠한 설명도 추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중들에게 비유가 지닌 그 이상의 의미를 깨닫도록 호소하여 말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무엇을 들으라는 말이었을까?
비유를 사용한 배경
씨를 활용한 비유법은 예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리스와 로마 문헌에서 씨 뿌리는 주제는 전형적으로 교육을 상징해 왔다. 씨 뿌리는 자는 스승을, 씨 뿌림은 가르침을, 씨앗들은 가르친 말씀을, 그리고 흙은 학생들을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씨를 가지고 비유를 구사한 것은 신의 아들이어서 언어의 사용에 막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시 헬라문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갈릴리는 지정학적으로 예수살렘보다는 헬레니즘으로 일컫는 이방문화의 영향을 쉽게 받는 곳이었고 상업적으로도 왕래가 활발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고급진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은 갈릴리의 비교적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진 무리였을까? 마가복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 지라.”(막3:8)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지역이고 두로와 시돈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단지 갈릴리의 평범한 무리들 뿐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문화에 익숙한 수많은 청중들을 모아 놓고 예수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란 본디 말하려는 내용을 보다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예수는 청중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이 비유를 들었던 것일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겉보기에 단순히 농사짓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광대하고도 심오한 함의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씨뿌림에 담긴 풍부한 철학적 함의를 유대와 헬라문화적인 요소들과 균형 있게 조화시켜 비유에 집어넣은 이가 예수 본인인지, 아니면 바울 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마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이 비유는 예수의 정신이 깃든 예수의 것이 분명하며 그 형태도 도마복음의 전승처럼 본래 예수가 말씀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가복음 4장 10절 이하는 예수의 비유가 청중들이 이해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적어도 예수가 홀로 있을 때 찾아온 핵심 추종자들과 12제자는 예수의 비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본래 하려던 말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키려고 하다가 더 어려운 비유를 들고 말았다. 성경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유를 드시려면 구태여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아도 당시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이 익히 알만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상생활의 관습, 문화 등에 비춘 것이어야 하며 듣는 자리에서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제자들의 속마음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선생님, 좀 쉽게 말씀해 주시지요. 쉽다고 비유로 드신 게 더 어려우니 도대체 누가 선생님의 비유를 이해한단 말입니까?” 예수의 변명(?)은 이렇다. “그들로 보기에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4:12) 이 말의 의미인즉, 일부러 비유로 어렵게 말씀하셨다고 봐야 할까? 마가복음 12장 12절에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를 두고 한 말인 줄 깨달았다고 기록했다. 이를 보건대 예수가 12절에서 말한 의도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수 있으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돌이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예수의 비유는 모두가 이해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깨달아 알 수도 있지만 끝까지 못 깨달을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귀 있는 자가 들어야 할 말씀인 것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 예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를 직접 해석한 예수
마가복음 4장 13절부터 예수는 자신의 비유를 알아듣기 쉽게 풀이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청중에게 풀어 설명하시면 좋았을 것을 예수는 그 간단한 방법을 제자들을 위해서만 남겨 놓으셨다. 사실 성경과 비슷한 형태의 《논어(論語)》>와 같은 고대 어록에서 현자가 자신이 말한 것을 재차 설명하는 예는 거의 없다.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은 스승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후학들의 몫이었다. 의문이 생기면 대화가 오가는 그 현장에서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는 자신이 비유를 들고 그것을 다시 풀어 설명한 것이 맞을까? 그 말이 맞다면 수많은 청중에게 알 수 없는 비유를 던지고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그 의미를 풀이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비유와 해석이 둘 다 예수가 한 것이냐 아니냐는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 비유가 예수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비유의 해석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모호한 상황과 비유 자체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는 문체의 사용에서 복음서 기자가 후기에 삽입하였다는 견해가 조심스럽게 대두되어 왔다. 결론적으로 마가가 예수의 비유를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제자들과 대화를 하는 방식으로 풀어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인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음성은 때때로 마가의 음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심지어 성령에 감화된 마가였다면 누가 그 둘을 구분해 내겠는가? 이런 논증에 어떤 이들은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돌판처럼 받침하나 바꿀 수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예수 사후 AD30년부터 마가복음이 쓰인 AD70년 경까지 마가는 적어도 40년의 공백기 동안 종말론적 교회분위기에서 예수의 삶을 반추할 자료들을 모으고 모았을 것이다. 기다렸던 예수의 재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다. 로마의 압제와 핍박은 여전했고 순교행렬이 줄을 이었다. 아마도 그 시기 마가공동체의 관심은 그들의 안전과 정체성을 유지하며 흩어진 예수의 말씀을 복원하고 언제일지 모를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예수의 비유는 공동체의 말씀으로 다시 해석되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가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지표로 삼았다면 마가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온 예수의 삶을 지표로 삼았다. 마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의 삶과 예수가 말한 숱한 비유에 대해 생각해 볼 어떠한 기회도 제공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를 삶의 현장으로 살려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까?
마가복음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13절은 이 비유가 비유를 깨달아 아는 방법에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15, 16, 18절은 씨앗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씨앗은 말씀을 가리킬 뿐 아니라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가리킨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들, 돌밭에 떨어진 씨앗들,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진 씨앗들은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여 열매를 맺지 못한 세 부류의 집단(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예수의 가족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사회적, 심리적 차원의 장애를 일컫는다. 비유를 비롯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사탄과 싸우는 영적인 전투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작업이며 세상의 염려를 버리고 재물과 권력 등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수련과 무관하지 않다. 예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단지 학문적인 작업이 아니라 사탄과 싸우며 자기 자신과 싸우고 예수께로 다가가는 수도의 과정이다. 이런 깨달음은 비유를 통해 감추는 방식으로 제시되지만 그 최종목적은 드러내는 것이다. 등불을 가져오는 목적이 평상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려 함인 것과 같다.(21절) 마가복음은 예수를 통해 오는 하나님나라를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 ‘겨자씨의 비유’(30절~32절)로 심화시켜 드러내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매우 크게 성장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커진다. ‘공중의 새’는 에스겔 31:6을 참조하면 여러 민족들을 가리킨다. 예수를 통해 회복하는 하나님나라는 유대인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을 향한 기쁜 소식이다. 마가에 의해 예수의 비유는 1세기 디아스포라에 직면에 있는 그리스도공동체에게 바울의 편지에 버금가는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새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위대한 꿈 앞에 메시아 예수의 비유는 강력한 것이었다. 마가가 이 비유를 마가복음의 앞부분에 배치한 이유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갈릴리 비유의 현장으로
예수 비유연구의 선구자인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는 비유에서 예수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비유를 해석하는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시대와 동일한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가 청중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유를 들었겠는가? 쉽게 말하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대부분 예수의 비유를 그 자리에서 듣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비유가 어려워진 것은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 비유에 새로운 의미들을 첨언한 후세의 사도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4장의 첫머리로 돌아가 우리가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청중의 입장에서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마구 섞여있는 허다한 청중들 앞에서 예수는 열매 맺지 못하는 세 부류 집단(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예수의 가족들)을 마음에 담고 비유를 들었을까? 그건 마가복음 2장~3장의 내용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현장에 있던 청중들이 예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어찌 알았겠는가? 예수의 비유는 그 자체로 독립된 에피소드처럼 완전한 형태로 청중들에게 들렸을 것이다. 청중들은 예수의 비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평범하지만 비범한 통찰력이 있는 언어로 예수가 비유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아마도 농부가 씨를 뿌리는, 씨에 얽힌 보편적인 철학을 비유에 담았거나 아니면 매우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비유에 담아 청중에게 이야기했을 개연성이 높다. 오늘날로 그렇지만 청중들은 관심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더구나 마이크도 없이 육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배 위에서 예수가 하는 말이 쏙쏙 귀에 들어왔을 리는 만무하다. 청중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이지?’ 옆 사람에게 되물으며 경청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는 의미
농부는 무심하게 씨를 뿌린다. 길가에도, 돌밭 위에도, 가시떨기 위에도, 좋은 땅에도 씨를 뿌린다. 농부는 씨가 떨어질 곳을 가려 씨를 뿌리지 않는다. 애초에 유대인들의 농지는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가 구분되지 않고 한 공간에 섞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부가 씨를 아무리 정성 들여 뿌려도 뿌린 씨의 20~30%만 뿌리를 내린다. 새가 와서 쪼아 먹을 수도, 뿌리를 내리다 중도에 말라버릴 수도 벌레가 먹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건이 잘 맞은 땅이면 풍요로운 결실이 맺힌다. 사탄이라든가, 핍박과 박해라든가, 유혹과 욕심이라는 부정적이고 인위적인 개입이 없다. 씨가 결실을 못 맺는 것도,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것도 모두 다 자연스러운 과정의 결과이다. 예수가 살던 당시나 오늘날이나 인간은 선택된 삶을 살 수 없다. 외부조건과 순리에 적응하며 살뿐이다. 씨를 뿌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모든 씨에서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농부가 있다면 그것은 과욕이고 어리석음이다. 씨가 열매를 맺는 과정은 지난한 좌절과 고통을 동반하며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기다림의 인내가 신앙이 되고 그렇게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다.
좀 더 현실적인 시대배경
예수가 살던 1세기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의 삶은 어땠을까? 로마 식민지배 하에 고리대금이 성행한 것은 이미 성서에 나와 있다. 농부라고 삶이 더 나아졌을까?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을 받아 농사를 짓고 수확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제한적인 몫을 되돌려 받았다. 흙이 없는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열악한 토지 환경에서 씨를 먹어치우는 새들과 강렬한 햇빛이 농부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올해의 수확에 실패한다면 돈을 더 빌릴 수밖에 없으며, 고리로 늘어난 부채를 상환할 수 없어 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가 이런 농부들의 삶을 어려서부터 주시하며 자라왔다면 농부가 씨를 뿌리려 나갔다는 비유의 시작은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 농부의 처절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수십, 수백 배의 결실이 온전히 자기 소유가 될 수 없는 농부들에게 예수의 비유는 더 없는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힘겨운 일상을 보내는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예수의 가르침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도전이자 용기이며 공정한 통치를 바라는 염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가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려고 모여들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마가복음이 집필되던 AD70년 경,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당하는 즈음, 마가공동체은 어떤 절박한 필요가 있어서 복음서를 쓰게 되었을까? 마가는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당하고,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한 사람씩 운명을 다하는 것을 지켜봤을 것이다. 로마의 박해 속에 공동체의 관심은 예수의 말씀을 새기고 결속하는 데 더 큰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함축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연의 순리에 적응에 가는 인생의 지혜나 농부들의 불합리한 현실비판은 예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공동체의 사명으로 더욱 강화되어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씀을 지켜야 하는 공동체로서는 예수의 기억을 되살리고 불안과 위협 가운데 신앙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예수의 격려가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이다.
예수의 비유에 얽힌 다양한 난제는 복음서의 기자에 의해 그대로 성서의 문구가 되어 말이 없다. 마가의 손끝에서 누군가는 예수의 음성을 듣지만 누군가는 역사적 예수의 목소리가 맞는지 끝없이 반추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예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성경을 읽으며 묵상할수록 예수의 삶은 신비스러움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 다가온다. 기독교인에게 예수는 문제의 시작이자 해답이다. 마가를 통해 알게 되는 구세주 예수는 마가의 예수일지 모른다. 나의 예수는 어떤 모습이며 예수의 비유는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어떤 의미일까? 마가복음 4장을 넘기며 떠올리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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