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그리고 부활
본문: 누가복음 24:13~24:35
프롤로그
부활과 관련해서 조금은 생뚱맞지만 제게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바로 『반지의 제왕』인데요? 2003년에 개봉한 영화 반지의 제왕 3편의 부제목은 「왕의 귀환」입니다. 영화에서 악의 군주 사우론은 중간계 최고의 요새 곤도르의 수도 미나스 티리스를 공격합니다. 펠린노르 평원은 오크와 나즈굴의 무리로 가득차고 미나스 티리스는 무능한 섭정 데네소르가 전쟁을 포기하면서 삽시간에 무너집니다. 봉화를 올려 지원군을 불렀지만 로한의 기병대는 오지 않았고 망자의 군단을 찾아 떠난 아라곤은 소식이 없습니다. 성벽이 뚫리고 모든 것이 절망인 상황, 사우론의 공격을 예감했던 백색의 간달프는 호빗 피핀과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피핀: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요.”
간달프: “끝나다니?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죽음은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또 다른 길이야. 세상을 덮은 잿빛 비구름이 걷히면, 눈앞은 온통 은빛 유리처럼 반짝이지. 그리곤 보게 될 거야”
피핀: “뭐를요? 간달프”
간달프: “하얀 백사장과 그 너머 빠르게 태양이 솟아오르는 저 먼 초록빛 나라가”
PIPPIN: I didn't think it would end this way.
GANDALF: End? No, the journey doesn't end here. Death is just another path, one that we all must take. The grey rain-curtain of this world rolls back, and all turns to silver glass, and then you see it.
PIPPIN: What? Gandalf? See what?
GANDALF: White shores, and beyond, a far green country under a swift sunrise.
여러분이 생각하는 부활은 무엇일까요? 혹시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가 펠린노르 평원에서 죽음너머 바라봤던 초록빛 나라는 아닐까요? 죽음을 넘어서는 힘, 악을 무력화시키고 세상 모든 것이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질서대로 돌아가는 그것 말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의 계절은 다가왔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십자가, 부활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헛되며 기독교도 없는 것이지요. 부활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부활을 바라보는 입장은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에서 시작해 그 해석이나 견해에 있어서 다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2018년 새물결플러스에서 펴낸 <부활논쟁>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책에서 존 도미닉 크로산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부활은 소생된 몸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한 육체의 부활은 단지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도 아니다. 육체의 부활은 역사적 예수가 구현한(embodied) 삶과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강한 효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구원의 주체로서의 임재를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톰라이트 이렇게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시작되고 그런 형태를 갖추게 된 유일한 이유는 예수의 무덤이 실제로 비어 있었고, 사람들이 실제로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이 모든 현상에 대한 가장 좋은 역사적 설명은 예수가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입장이 다른 게 느껴집니까? 같은 것이 있다면 예수의 부활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는 매우 중대한 신학적 이슈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에 대한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증거와 논리는 세상에 넘쳐납니다. 듣고 있으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뭐가 옳은 걸까요?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고 어제 일어난 일도 팩트체크 없이는 못 믿는 세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부활이 진짜 사실이냐는 질문보다는 부활이 우리 삶에 무엇인가라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저에게 부활의 의미가 뭐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려고 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예수를 통해, 그를 믿고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라고요. 부활은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자의 문제이며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게 표현해 본 것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김근주 교수님이 펴낸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이란 책에, 부활신앙의 본질을 언급한 부분에서 더욱 힘을 얻습니다.
“부활신앙의 본질은 내세와 영생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겪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이다.”
부활은 저 너머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매우 현실적인 도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성경본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저는 누가복음 24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부활의 현존성이라는 측면에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성서기자 중에 오직 누가만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체험한 것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다른 성서의 기자들이 말하고 있지 않은 이 이야기를 등장시켜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드라마틱하며 가장 문학적입니다.
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믿었는데 기대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설상가상으로 동굴에 안치된 시신까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실의와 낙담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10여 킬로 떨어진 엠마오로 체념하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걸로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다니, 누가 봐도 뒷심 부족한 스토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비극의 막장을 받아들이기가 무섭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을 때 모두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더 이상의 가상현실은 없다. 제자들은 꿈에서 깨어 현실을 부정하든가 아니면 회피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보냈던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기가 두려웠습니다. 그저 현실과 떨어져 잠시 유보시켜 놨던 과거의 삶 속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살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낯선 사내를 만났습니다. 그는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능통했고 선지자들이 말했던 것들을 더디 믿는다고 책망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뭐지?”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도 못했으니 그의 말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죽음과 시신의 실종이 의미하는 다른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자들은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신비스럽고 낯선 사내가 그대로 길을 떠나도록 보내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설명을 듣는 내내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뜨겁고 가슴이 뛰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더 좀 들어봐야겠어” 제자들은 떠나려는 그에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더 머물자고 강권했습니다.
Ⅱ. 부활한 예수
저녁시간, 그 사내는 떡을 떼어 축사하고 두 제자에게 나눠줬습니다. 잔잔한 그의 음성이 제자들의 흐린 기억 속으로 파고듭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의 기억이 떠오르며 제자들의 눈이 순간 밝아졌습니다. “혹시 당신이 그 입니까?” 의심은 확신으로 빛났습니다. 순간 제자들은 그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못 알아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눈앞에 예수가 있었고 모르는 척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의도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좀 설명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보다는 제자들의 마음 상태에 의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누가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예언을 새롭게 이해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부활한 예수의 계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을 본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자들은 Solvitur Ambulando,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와 대화하고, 함께 머물고, 함께 떡을 떼는 가운데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함께 빵을 나누는 한 부활한 주님이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예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누가의 숨겨진 메시지를 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서술 방식은 사실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하는 매우 연극적이며 문학적이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객은 모두 알아보는 데 연극을 하고 있는 제자들만 못 알아보고는 그런 상황말입니다.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자 예수님은 갑자기 사라집니다. 마치 무대에서 예수님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제자들만 빛 가운데 서 있는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라져야만 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제가 조금 어렵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진리와 마주쳐 깨달음이 오는 순간 진리의 형상은 사라집니다. 진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개체 넘어 온전하게 존재할 것으로 보이지만 진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개체들에 의해 구체화될 때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제자들에게서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는 두 제자의 대화에서 마음이 속에서 뭔가 “뜨겁지 아니하더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뜨겁지 아니하더냐 <καίω 카이오>”
저희도 말씀을 읽을 때나 찬양을 할 때 뜨거움을 느끼지요? 제자들의 심장이 깨달음으로 인해 뜨거워졌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적어도 제자들의 경험을 통해 후대의 신자들 역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부활한 예수의 임재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충분히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Emmaus)의 원래 뜻이 ‘hot spring(뜨거운 샘, 온천)’이라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가 만난 것은 진짜 예수님이었을까요? 아니면 거부할 수 없이 강하게 임한 예수님의 현존, 그 뜨거움이었을까요? 아니면 둘 다가 맞을까요? 제가 성경, 특히 복음서가 재밌다고 하는 건 바로 이런 은유의 내러티브가 매우 리얼하면서도 드라마틱하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1세기의 성경의 독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현존이 되는 것을 이렇게 놀랍고 디테일한 이야기로 표현을 했으니까요?
요즘은 ‘부활’이란 말이 예전 인기 있었던 미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주인공 ‘존스노우’의 예견된 ‘부활’처럼 거부감 없는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부활은 사실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9:18-26)이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7:12-15), ‘나사로’(요11:38-44)의 ‘다시 살아남’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영원한 고유명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제자들은 다시금 현실과 마주 섰습니다. “이것이었구나! 예수님은 살아있다. 예수님의 구원은 고작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은 이스라엘과 온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주인공인 구원의 장대한 퍼즐조각이 마침내 맞춰졌습니다. 제자들은 밤길을 헤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이 귓가에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낙담하지 마라. 엠마오로 가지 마라. 부활이 현존하는 네 삶의 현장응로 돌아가라!” 두려움이 클수록 희망도 더 커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체념과 두려움 대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설렘과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에 의해 보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이 그들을 증인으로 만들어 발걸음의 방향을 돌려놓게 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삶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톰라이트는 『예수』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았고 예수의 죽음이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최후의 전투에 사용된 위대한 전술이나 하나님의 비밀병기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 모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꿈도 꿀 수 없었던 방법으로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톰라이트 『예수』(살림,2007)
부활과 십자가는 흔히 동전의 양면 같은 복음의 핵심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매우 신학적인 표현을 하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확증할 때(롬 1:4) 십자가는 성자 하나님이 죽은 사건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피’(행 20:28)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만 십자가의 의미와 예수님의 보혈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에 의해서 조명됩니다. 부활의 복음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부활’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두서없는 제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보여드릴 그림이 하나가 있습니다.
Ⅲ. 다시 생각하는 부활
렘브란트(1606-1669)가 그린 <엠마우스의 순례자들[Les pèlerins d'Emmaüs] >이라는 그림입니다. 보시다시피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비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과 식사를 하며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인데 누가복음 24장과는 다르게 제자들의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고 안정적입니다. 기교가 없고 평온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이 그림이 렘브란트가 42세 때,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의 죽음이라는 쓰라린 시간을 겪고 난 후 그린 것을 알았습니다. 1648년의 일입니다. 가족과의 이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속에 렘브란트가 마주 선 것은 예수의 부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처지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같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예수의 부활은 그에게 검증의 대상이나 혹은 격정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을 맺으며
삶이 힘든 사람에겐 엠마오로 가는 길이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한숨 섞인 푸념으로 좋았던 추억을 되뇌기도 하겠지만 마음은 여전히 외롭고 힘들 것입니다. 그때 아마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구원자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의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하시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붙들고 한 밤 정도는 머무시게 할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직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심장, 피로가 가시 듯 밝아지는 눈. 엠마오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호사가들은 나름 근거를 들어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굳이 엠마오의 위치를 가지고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의 온기와 말씀이 남아 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그곳에서 ‘부활’은 여전히 살아있는 현존이며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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