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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읽는 성서

한 말씀만 하소서 (feat. 가상칠언 이야기)

by 하늘밑 2024. 10. 17.
『The Three Phases of Life and Death』1509.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HANS BALDUNG GRIEN(1484~1545)

 
 

들어가며
 
These tears mean It's settling in That I'm not Gon' see you again
'Till one day In another life Where I'm gonna be alright
이 눈물의 의미는 널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에 적응한다는 뜻이야
내가 괜찮아질 또 다른 삶의 어느 날까지
Andy Grammer,「These Tears」中
 
저에게는 옛날부터 습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물의 나이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은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을 1824년 5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하였습니다. 올해가 200주년이라고 합니다. 이때 저는 베토벤의 나이를 확인해 봅니다. 당시 베토벤은 54세(1824년)였습니다. 베토벤은 3년 후인 1827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문단은 어떤가요? 소설가 김유정은 30세에, 이상은 28세에, 시인 김소월은 33세에, 윤동주는 29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들 짧고 굵게 인생을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습관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장 공평하고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진리입니다. 죽음은 언젠가는 다가올 일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다 알지만 죽음만큼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그들의 이야기도, 당신의 이야기도 아닌 곧 일인칭 나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텃밭에서 여러 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식물에게도 죽음이 있을까? 식물은 봄바람이 닿으면 온 에너지를 분출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만,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치면 잎으로 가던 에너지를 줄여 열매를 맺고 다음 생을 준비합니다. 씨를 만들어 냅니다. 식물에게는 죽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고 다를까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니 식물에 빗대어 보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죽더라도 자식을 낳아 삶을 연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란 영원이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이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4)
 
하나님은 자손에서 자손으로 이어지는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이어짐입니다.
 
죽음이 한 순간의 소멸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의미한 약속일 것입니다. 죽음은 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게 삶의 당연한 양상입니다. 죽음은 늘 예고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을 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노안이 심해졌습니다. 허벅지 근육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단기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했던 말을 또 합니다. 머리는 이미 희어서 어디를 가려면 염색을 해야 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죽어서 떨어져 나간 피부 각질이 방바닥에 하얗습니다. 모두가 잠을 잡니다. 사람에게 잠이란 신이 허락한 안식과 죽음의 징조입니다. 잘 생각하면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것, 달이 기울고 차는 것은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매일 일깨워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은 늘 삶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죽음은 예로부터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어찌 보면 언젠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근원적 개념입니다. 의미있는 삶이란 삶의 유한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입니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이런 인간의 특성을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드는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김상욱,「떨림과 울림」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소박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답을 저는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남긴 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 박완서,「호미」
 
사람이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삶과는 별개라고 밀쳐내는 순간 죽음은 불안이 됩니다. 노자(老子)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그 둘을 전관(全觀) 함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말했습니다. 장자(莊子)는 죽음이란 영원한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 眞’이며 천리(天理)라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이 가져올 내 존재의 무화(無化)를 극복하기 위해 영원히 썩어지지 아니할 것으로 공덕(功德)과 언행(言行)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죽음보다는 현세의 삶을 더 중요시한 것이죠. 우리 조상들의 유가적 틀에서 죽음은 혼백(魂魄)이 분리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이란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삶의 공간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조상과 자손과의 지속적 관계로 보고 오직 자신의 책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율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육체적 죽음보다는 도덕적인 죽음을 더 부끄럽게 생각하고 죽음보다 더 큰 삶을 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있으면서 자신의 묘지명을 남겨 늘 죽음을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절대자의 구원을 바라는 기독교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어떤 말을 남기겠습니까? 독일의 문호 괴테는 “좀 더 빛을...조금 더 빛을.”이라고 멋있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호사가의 말일뿐입니다. 괴테의 임종을 지켰던 하인 하프리드리히 크라우제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괴테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요강을 끌어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멋진 죽음은 없어 보입니다. 삶의 최후가 괴테처럼 아름답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개별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예수의 가상칠언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즐겁지만 한 편 두렵기도 합니다. 때로는 굳은 신념을 허물어야 하는 도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힘이 세고, 진짜는 여유롭습니다. 믿음은 불완전해 보여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를 넓은 마음으로 여유 있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최후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유언과도 같은 7개의 최후발언을 십자가상에서 남겼습니다. 사복음서 나오는 이것을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Words from the Cross)’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남김 최후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비슷한 내용으로 한 개, 누가복음에서 세 개, 요한복음에서 세 개 해서 모두 7개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모았을 때 7개가 되는 것이지 어느 복음서도 그 속에 7개를 다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일곱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7이라는 숫자가 주는 성경의 상징은 완전함과 안식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전통에서도 수의를 묶을 때 일곱 매듭을 합니다. 인간의 생사를 북두칠성의 신이 주관하고 있다고 본 것이죠. 우연일까요? 예수님이 남긴 7개의 최후발언을 복음서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15:34, 마27:46)
2)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4)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5)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6) 내가 목마르다.(요19:28)
7) 다 이루었다.(요19:30)
이상 개역개정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7개 최후발언을 십자가에 달리셨던 오전과 오후, 시간순으로 임의 정리하여 전체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고 하나씩 주제로 삼아 설교하곤 합니다. 이렇게요.
 
①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② 누가복음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③ 요한복음 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④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⑤ 요한복음 19:28 "내가 목마르다"
⑥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⑦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신학자 중에는 복음서가 상호 보완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④번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숨지기 바로 직전, 즉 오후 3시에 한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은 ④번을 ⑤, ⑥, ⑦말씀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즉 ④번 말씀을 하고 뒤이어 ⑤,⑥,⑦ 말씀을 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요한의 의도를 벗어나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의 기자의 의도에 따라 기록한 것이기에 하나로 묶어서 다룰 수는 없다고 봅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철저하게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복음서를 기록했던 저자들의 시각일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편집비평이라고 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제가 오늘 말씀을 나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복음서마다 예수님이 남긴 말에 차이가 큽니다. 마가복음의 50%가량을 가져와 저술하였다는 누가복음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최후발언을 자기 복음서에 아예 소개하지 않았고,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앞서 소개되어 있는 최소한 네 가지의 최후발언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자기만이 알아낸 말씀을 새롭게 기록하였습니다. 누가와 요한은 왜 마태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최후발언을 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마가와 마태는 왜 그렇게 예수님의 발언을 소략하게 기록했을까요?
 
성경기록을 유추해 보면 예수님은 약 6시간(오전9시~오후3시)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제대로 말씀이나 하셨을지 의심이 생깁니다. 실제로 마태, 마가복음을 보면 십자가 곁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르짖는 소리조차 잘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엘리 엘리”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착각하여 엘리야가 어디 와서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주는지 보자고 하였으니까요.(막15:35~36) 아마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예수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봤을 겁니다. 복음서들이 소개하고 있는 일곱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여부는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에 의해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복음서를 간략히 보겠습니다.
 

마티아스 그뤼넨발트 (1475~1528 경 ), 이젠하임 제단화 < 십자가 처형 >, 1515, 프랑스 콜마 운터린덴 미술관

 



■ 마가복음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표준새번역 막15:34)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복음서입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중요한 이유는 마가가 복음서을 기록하던 그 시기에 마가 공동체 교인들이 예수님이 당했었던 것과 같은 수난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D. 64년, 로마의 네로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정치적 박해를 가했고 A.D. 66년 1차 유대전쟁의 시작으로 박해는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마가복음은 A.D. 70년경 기록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직후, 마가 공동체는 하루하루의 생존이 무엇보다 절박하였을 것입니다. 마가는 역사가가 아니라 설교자였고 전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가 닥친 고난을 적절히 대처하고 잘 극복하도록 신앙적으로 지도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마가공동체의 수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습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극적인 묘사입니다. ‘엘로이 엘로이’는 히브리말이고, ‘레마 사박다니’는 아람어입니다. 예수님이 남긴 이 말은 사실 시편 22편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신의 도움이 1도 느껴지지 않는 절망 중에 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처절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 말씀만 읽으면 자체가 절망일 수 있지만 이 시편은 고통을 당하는 의인의 기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이 시편은 절망의 시편이 아니라 생명의 소망을 담은 시편입니다. 예수님이 지르셨던 울부짖음은 마가 공동체에서 자주 들려왔던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동료 기독교인들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막15:37)
 
소름이 돋도록 사실적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두 번 크게 소리 질렀다고 나옵니다. 첫 번째 큰 소리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였습니다. 두 번째 큰 소리는 무엇이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크게 비명을 지르신 것은 아닐까요? 아마 그 시대 박해를 당하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마가는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입을 통해 보태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정말 솔직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유언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최후발언 중 모두가 지어낸 것이고 단 하나만 진짜라고 한다면 저는 서슴없이 마가복음의 말씀을 꼽겠습니다.


 
■ 마태복음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하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표준새번역 마27:46)
 
마태복음은 마가복음보다 대략 20년 정도 후에 지어진 것으로 내용의 90% 이상을 마가복음에서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말도 서로 거의 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마태는 마가에 비해 서술을 더욱 완전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헬라어로 “엘로이 엘로이”라고 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헬라어로 “엘리 엘리”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상으로 보면 마가복음은 ‘나의 하나님’으로 주격으로 표현한 것을 마태복음은 “나의 하나님이여”로 친근한 호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엘로이를 엘리라고 한 것은 엘리야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여집니다. 마태는 무척 조심스럽게 예수님의 유언을 기록하였고 마가복음의 원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음은 누가복음입니다.



 
■ 누가복음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표준새번역 눅23:34)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에서 50% 정도의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나머지 반은 누가가 새롭게 발굴한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최후발언이 세 개 나옵니다. 모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입니다. 특이한 것은 세 말씀 중 두 개가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기도문을 넣은 것이 누가복음 전체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누가복음 속의 예수님은 항상 기도합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할 때(6:12),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9:18), 변화산에서 기도할 때 모습이 변하셨고(9:28~29),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11:1), 수난 전 감람산에서도 간절하게 기도(22:39~46)하셨습니다. 두 개 중 하나는 ‘용서’의 기도였고 나머지 하나는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 ‘낙원의 축복’을 약속하는 말입니다. ‘기도’와 ‘용서’, 죄인에 대한 관심은 누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누가는 자신의 주요 신학적 관심사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려고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예수님의 이 기도는 사도행전 7장 60절의 스데반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 했던 기도와도 일치합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상반)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눅23:43)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죄수는 “너가 그리스도면 우리를 구원하라”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지만 다른 한 죄수는 “이 분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며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자비를 구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애매한 표현 대신에 ‘오늘’이라고 명시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황홀하며 극적인 순간이 있다면 여기라고 저는 믿습니다. 버림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한 줄기 구원의 빛, 예수님은 함께 할 그날이 바로 ‘오늘’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나와 함께”라는 표현에서 용서를 구체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스스로 천명하신 내용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개역개정 눅4:18~19)
 
예수님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서도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죄수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죄선언은 누가복음을 보면 빌라도에 의해 3번(눅 23:4, 12, 22) 헤롯에 의해 이미 한 번(눅23:15) 나왔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에 의한 구원이 오늘 이루어졌음을 누가복음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으시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표준새번역 눅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는 시편 31편 5절을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문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면서 적들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며 죽음 후 아버지께 되돌아간다는 것을 강조하는 평화로운 위탁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큰소리’로 부르짖은 것은 마가복음과는 달리 ‘기도’의 형식 안에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구세주이지만 소리지르고 울부짖는 것이 보기에도 그렇고 마음에도 안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였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과감히 빼버리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라는 시편 31편 5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죽음의 격정이 느껴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기도와 용서, 평안함이 넘치는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또 누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꾸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은 2장 49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말 이후로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는 ‘아버지’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을 일관되게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하나님과 아들 간의 관계,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A.D.100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최후발언이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유언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고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요19:25) 최후발언을 들은 대상은 더욱 뚜렷한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죽음이 임박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연극의 방백처럼 또렷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보시고, 또 그 곁에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로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 (표준새번역 요19:26~27)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주로 베드로와 함께 등장하였는데 여기서는 베드로가 빠져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제자의 지위는 예수님의 형제만큼 높아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 첫 번째 표적이었던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와 예수님 공생애 활동의 마지막인 십자가 처형 현장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를 높이기 위한 의도적 편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성경구절의 의미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현재 매년 9월 15일을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이라고 해서 절기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며 당부한 것을 볼 때 육신의 어머니를 부정하였다기보다는 혈육의 관계를 넘어서는 신앙의 관계로 관계가 발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도 사랑하는 제자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녀를 여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중요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복음서이기도 하니까요.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첫째 제자로 교회의 반석이 되어,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 곧 수제자로 높은 지위에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런 베드로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제일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요1:40~42) 요한복음에서만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도 매우 의도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은 나오긴 합니다. 바로 베다니의 마르다의 입에서 나옵니다. 어찌보면 베드로가 마르다에게 밀린 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복음서에 또 다른 제자, 사랑하시는 그 제자, 또 다른 제자 등으로 표현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는 제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베드로의 질문을 받아 대신 예수님에게 전달하였고(13:22~25),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에 끌려갈 때도 주도적으로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했으며(18:15~16), 부활 현장인 빈 무덤에서도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가 동시에 함께 달려갔는데 사랑하는 제자가 먼저 도착한 것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20:1~4),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여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 잡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에도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것도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21:1~7)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예수님의 모친을 예수님을 대신하여 아들로서 모시는 매우 중요한 제자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 공동체를 위해 상징성과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함께하였고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도망치거나 사라진 것과는 달리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이 모든 것을 증거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누구일까요? 아리마대 요셉일까요?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요한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가공의 인물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복음 앞부분에 나오지 않다가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하는 13장부터 등장합니다. 익명으로 한 것이 오히려 그의 권위를 더 높이게 한 것 같습니다.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통해 자신을 이 제자와 동일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유대기독교라도면, 사랑하는 제자는 마가나 마태의 공동체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방기독교도로 예수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기독교인들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암튼 예수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로 인해 요한 공동체의 위상은 매우 상승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베드로가 아닌 사랑하는 제자를 가장 권위있는 지도자로 인정한 듯 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이방선교는 베드로와 바울이 주축이 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제자가 속한 공동체가 베드로에 비하면 비주류였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표준새번역 요19:28)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동안 견뎌내야 할 혹독한 고통, 육체적 갈증은 확실히 복음서 기자에게 깊은 의미를 남겼을 것입니다. ‘목마르다’라는 표현은 시편42:2, 시편63:1, 시편22:15 등에 등장합니다. ‘목마름’은 매우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요한복음 저자는 그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영지주의 가현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가현설은 신적 존재인 예수께서는 잠시 인간의 몸을 빌어 그 안에 거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았고 따라서 죽지도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목마르다’는 육신을 입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갈증을 느낀다는 의미 이상의 그 무엇, 즉 모든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육신이 되심(요1:14)을 강조하여 영지주의를 일축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시고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표준새번역 요19:30)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말에 사람들은 곧장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꿰어다가 예수님의 입에 대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입에 적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우슬초가 아니라 갈대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우슬초가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묻혀 문설주에 바르는 도구라는 것을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었으니 예수님을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자 요한은 갈대를 우슬초로 바꾸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목숨을 거둔 시간은 오후 3시로 유월절 양을 잡기를 시작하던 저녁 시간과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라고 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마태나 마가가 예수님의 마지막 말로 선언한 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습니다. 요한은 이 불완전한 끝맺음이 맘에 들지 않았나봅니다. ‘다 이루었다’는 완료시제로 이미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보이는 나약한 패배의 외침을 승리의 외침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성하고 하신 말씀과 묘하게 오버랩됩니다. 요한복음의 첫 시작이 창세기와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에서 온 인류를 구하는 재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낸 예수님의 최후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보듯 평온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돌아가셨습니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다,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죽음을 스스로 주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메시아와 동일시됩니다.(요1:41) 복음서 중에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메시아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말씀인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왔다고 말합니다. 즉, 신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존재를 모두 말하였습니다. 완전한 신, 완전한 인간, 이 두 가지의 조화가 당시에는 시급했을 것입니다. 초대교부들이 A.D.451년 10월, 칼케돈 회의에서 예수님에게 있는 두 본성의 기독론을 작성할 때 그 단서를 이 요한복음에서 찾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amp;amp;lt;우리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내려다 본 것&amp;amp;gt; 제임스 티소, 1890&amp;amp;gt;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의 궁금증에 한 말씀이라도 하시면 좋겠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7개의 최후발언은 모두 예수님이 정말 직접 하신 말씀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만큼이나 잘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에 기록한 것처럼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큰 소리만 지르고 최후를 맞이했어도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은혜롭다로 마침표를 찍으면 모르겠지만 온도 차이가 심한 예수님의 최후발언을 읽고 있으면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자신이 공동체에 하고 싶어하는 말을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신적인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말, 복음서의 저자가 하려던 말은 모두 현실이라는 냉혹한 삶의 터전을 기반으로 합니다. 회의와 확신 속에 쉼 없이 그 둘 사이의 경계를 오가면서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고, 당면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숙명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에는 고통과 격정, 울분이 있기도 하고 용서와 죄사함이 있으며 구원의 뜻을 최종 완성하는 평화로움마저 깃들어 있습니다. 7개의 최후발언은 서로 상이한 차이가 있음에도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향하고 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이니 빨리 죽으라고 우리에게 죽음을 최촉(催促)할 수도 있으련만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너희는 평안하라. 살아서 영생의 삶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요한복음의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은 우리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폭탄을 안고 불안에 떨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외면한 삶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삶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사는 것만큼 죽음은 소중합니다. 세상은 죽음으로 충만하지만 또한 생명으로도 충만합니다. 가로의 길이 이 땅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세로의 길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입니다. 가로가 인간의 길이라면 세로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만나서는 안될 것 같은 두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삶의 지평은 죽음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소망은 현세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일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ljYXsWWGs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최후의 일곱 말씀'(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osers am Kreuze>, 혹은 <가상칠언>일고 불리는 이 곡은 하이든이 직접 관현악곡, 현악 4중주, 오라토리오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편곡해 재발표할 만큼 애착을 가진 곡이다. 네 복음서에 흩어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주제로 하이든이 곡을 붙였다. 비장한 느린 서주로 시작해 예수님의 일곱 말씀, 그리고 마지막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는 악장이 이어진다.

  • Introduction
  • Largo: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 Grave e cantabile: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 Grave: Woman, behold your son
  • Largo: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 Adagio: I thirst
  • Lento: It is finished
  • Largo: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 Il Terremoto: The earth shook and the rocks spl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