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창32:28)
Ⅰ. 들어가며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이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지금도 누가 제 이름을 부르면 무척 낯설어합니다. 내가 아닌 나라는 존재에 명찰을 달아 놓은 느낌이랄까요? 성을 포함한 세 글자에 제 평생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는 느낌은 자유로움보다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름은 평생 씁니다. 무덤에까지 이름을 써 놓지 않습니까? 이름은 인생이고 운명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이름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김춘수의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말은 존재의 각인이 이름을 통해 이루어짐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태어난 해와 달과 날짜에 의해 이름이 운명처럼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족의 영혼이 이름에 담긴다고 믿었던 것이죠.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을 보시면 북아메리카 인디언 수족의 이름이 참 재밌습니다. ‘열 마리 곰’, ‘머리에 부는 바람’, ‘발로 차는 새’ 이런 식입니다. 이름에 우리의 운명이 묶여있더라도 그것을 즐겁게 받아 드린다면 큰 축복이겠지만 부모님이나 작명소가 지어준 이름이 자신의 정체성과 충돌이 일어난다면 그것만큼 불행이 없습니다. 옛 선인들은 어릴 적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대신 태어난 곳이나 좋아하는 대상, 인생의 지향점 등을 담아 ‘호’라는 것을 지어 이름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호(號)’는 스스로 짓거나 친구들이 적절하게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호’를 지어 부르는 전통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에 맞게, 처한 상황에 맞게 자신에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니까요.
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름의 의미를 환상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로 표현한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2002년 개봉한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せん)と千尋(ちひろ)の神隠(かみかく)し』입니다. 만화영화는 아이들만 본다는 선입견이 무색하게 일본에서만 2400만 명이 관람하였고 서구의 수많은 매체가 21세기 최고의 영화 중에 하나로 선정하였습니다. 지금도 영화 평점 관련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신선도 지수가 96% 일 정도로 인기가 좋습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일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는 이름입니다. 주인공인 열 살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이름은 ‘치히로(ちひろ)’입니다. 한자로는 ‘천심(千尋)’인데 이름의 의미가 ‘천 길의 깊이’입니다. 반면 ‘센(せん)’은 한자로 숫자 ‘천(千)’을 의미합니다. 유바바라는 마녀는 치히로의 성과 함께 이름 끝자 ‘심(尋)’자를 마법으로 지워버립니다. 이제 치히로는 이름 대신 한 글자의 숫자 ‘천(千)’, 즉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치히로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존재의 의미’를 빼앗긴 후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갑니다. 영화의 제목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존재의 진짜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가 소중한 것을 잊지 않고 지킬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Ⅲ. 이름의 의미와 피휘(避諱)의 전통
모든 사물은 이름이 있어야 비로소 구체적인 존재가 됩니다. 존재의 세계는 언어로 규정되며 동시에 문자 체계가 성립됨으로써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름의 존중을 거의 신앙으로 삼았던 유교의 전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유교를 다른 말로 이름 ‘명(名)’을 써서 ‘명교(名敎)’라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한자로 ‘이름 명(名)’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요? 중국 문자학의 기틀을 마련한 후한시대 허신(許信)은 ‘명(名)’을 “밤에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입으로 부른다”는 의미로 풀이했습니다. 윗부분이 ‘저녁석[夕]’이고 아랫부분이 ‘입구[口’]라서 겉보기에 그럴듯합니다. 오늘날 널리 통용하는 이런 해석은 사실 실재를 개념화하는 언어의 상징체계를 무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신은 한자의 기원인 갑골문을 몰랐기 때문에 작의적인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한자를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들은 ‘이름명’의 윗부분이 저녁달이 아니라 제사에 사용하는 제육(祭肉)을, 아래의 네모 부분은 입모양이 아니라 제사용구로 신에게 비는 축문이나 제물을 담는 그릇이라고 봅니다. 아이를 길러서 그 아이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제사를 지내 씨족원으로서 이름을 부여하고 신에게 승인을 받았던 것이지요. 이름은 인격의 실체와 분리할 수 없으며 매우 신성하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이름을 감추거나 남에게 알리기 꺼려하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감춘다는 것은 경시한다기보다 극단적으로 경원하고 숭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에 대한 금기는 ‘피휘(避諱)’라는 풍습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별세와 함께 ‘휘(諱)’라고 불리는데 자식은 절대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자신의 글 가운데 언급해서는 안 됩니다. 당나라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는 평생 자신의 시에 ‘한(閑)’이라는 글자를 쓰지 못했습니다. ‘한가하다’라는 뜻의 이 평범한 글자를 시에 쓸 수 없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자신의 부친의 이름에 ‘한(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정기(蘭亭記)」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정(正)’이었기 때문에 정월을 ‘일월(一月)’이나 ‘초월(初月)’로 표기했습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부친의 이름에 ‘담(談)’들어간다는 이유로 역사상 실존 인물인 조맹담(趙孟談)을 조동(趙同)으로 고쳐 표기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 임금은 이름이 대부분 외자입니다. 그것도 거의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로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은 ‘이도(李祹)’, 정조는 ‘이산(李祘)’입니다. ‘복 도(祹)’자나 ‘산가지 산(祘)’자는 일상에서 잘 쓰지 않습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꿨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역대 왕들의 이름이 답안에 한 글자라도 들어가면 무조건 낙방이 됨은 말할 것도 없고 중형을 받게 됩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를 임금의 이름에 굳이 사용한 이유는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도, 해당 한자를 사용할 수도 없는 전통으로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을까 배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피휘의 전통은 심지어 황제와 같은 존엄한 사람의 이름자가 들어갈 경우 고의로 획을 빼는 결필(缺筆)의 방법이나 탈자(脫字)의 방법까지 사용하게 되어 오늘날 작품의 창작연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흔히 일상생활에서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길자(字),동자(字)’라고 조심해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존재의 근원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천명한 것이지요. 가끔 마블[MCU]이나 디씨[DC]에서 만든 영화의 주인공들이 토니 스타크나 브루스 웨인이라는 멀쩡한 본명을 놔두고 굳이 “아엠 아이언맨”, “아엠 베트맨”이란 대사를 수시로 쓰는 것은 스스로 신을 오마주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서사는 내막을 알고 있으면 우습기도 하고 한편 무섭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거룩해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신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하는 명사로 ‘엘로힘(Elohim)’을 사용하거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주(主, Lord)’라는 뜻의 ‘아도나이(Adonai)’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하나님’은 유일 절대자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라는 수사에 ‘님’이라는 존칭접미사를 붙인 일종의 신조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수사에 접미사를 붙이는 방식이라 어법상으로 매우 어색합니다. 수사는 보통 관형어로 명사를 수식하거나 명사 다음에 세는 단위로 써야 어색하지 않습니다. ‘한 개의 연필’ ‘연필 한 개’처럼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의미의 ‘하늘님’ 혹은 ‘하느님’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한 것처럼 아도나이(Adonai)의 한자 표현인 ‘주님’이 더 적합해 보입니다.
유일신 개념이 없었지만 동양사회에서는 역사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이름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이름은 그 사람의 실체를 온전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중요시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름을 높이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이름값을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저버리는 행위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바로잡으려 하였습니다. 유가에서 죽고 나면 썩어 없어질 이름에 집착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실질[實]에 부합하는 이름[名]을 후세에 전함으로 인해 헛된 명예[虛名)]를 좇아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게 하려는 장려의 의미가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이름 값하며 살기란 예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 없이 이름만 사용하였고 자식이 아버지나 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는 『유대 전쟁사』에서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이름의 진짜 주인공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무게로 어릴 때부터 이름값을 하려고 무척 힘들지 않았을까요?
Ⅳ. 야곱과 이스라엘
성경에서 이름으로 위대해진 사람을 고르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야곱을 꼽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다”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뒷덜미를 잡다”의 어감으로 더 낮잡아 부르면 “남을 속이다”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델(Bethel)에서 야곱을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28:14)라고 하며 축복하였습니다.
야곱은 평소 잔꾀와 의심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고, 아버지인 이삭을 속여 형에게 갈 축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외삼촌 라반을 속여 모든 재산을 가로채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축복까지 의심한 야곱은 조건을 붙여 이렇게 다시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창28:20~22, 새번역)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가 얍복나루에서 동이 트도록 씨름을 하며 끝내 야곱의 엉덩이뼈를 세차게 걷어차 정신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씨름에서 이겼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이겼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뼈가 탈골되었으니 겉으로 보기에 야곱의 TKO패가 분명합니다. 야곱이 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천사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렘브란트는 천사의 얼굴은 환하게 야곱의 얼굴은 어둡게 그렸다. 야곱보다 천사의 얼굴이 돋보인다. 렘브란트가 묘사한 천사와 야곱의 얼굴을 보면 무엇인지 모르게 평안하다. 씨름의 격정이 없다. 야곱은 눈을 질끈 감고 있지만 힘을 쓰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듯하고 천사는 그런 야곱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천사는 야곱과 씨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과 싸우고 있는 야곱을 자신의 품에서 흔들리거나 벗어나지 못하도록 잡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천사와 진짜 씨름을 했을까요? 밤새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 진땀을 흘리며 기도한 것을 씨름하였다고 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재미있는 상상은 창세기를 읽는 큰 즐거움입니다. 베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야곱이 다시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은 형 에서와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씨름하며 사투하는 야곱의 두려움과 고뇌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델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다리에서 보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직접 씨름을 하는 것으로 야곱의 내적 갈등은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넘어뜨리려는 씨름꾼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패커는 『소망』(Never Beyond Hope-How God Touches & Uses Imperfect People IVP 출판사 2003)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 씨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기 전에 먼저 넘어뜨리신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넘어뜨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교만, 자부심, 잔꾀, 선제공격, 자기신뢰 그리고 의도적인 적대감으로 우리 자신을 드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를 넘어뜨리십니다”
엉덩이뼈가 탈골되면서까지 버려야 할 것을 교만, 자부심, 잔꾀, 선제공격, 자기 신뢰, 의도적인 적대감과 속임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패커 목사님의 분석에 의하며 야곱은 결국은 이것들을 버리려고 그렇게 갈등했던 것입니다. 씨름이 끝나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뜬금없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창32:27)
“야곱입니다.”(창32:27)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하나님은 더 이상 야곱이 네 이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창32:28)
이 말은 제게 “야곱아, 너는 더 이상 현재의 모습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 이스라엘로 살아라”라는 말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고민을 한 가지도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야곱이 당면한 문제가 아니라 야곱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주는 복이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새롭게 맺는 것이었고 그 징표가 존재의 본질인 이름을 바꾸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뒤바뀜의 순간을 ‘이겼다’라고 표현한 듯합니다. 야곱에겐 졌지만 이기는 싸움, 이기기 위해 지는 싸움이었습니다.
“Better a spectacular failure, than a benign success” (온순한 성공보다 장렬한 패배가 낫다)
야곱은 사실 말콤 멕라렌(Malcolm McLaren,1946-2010)의 유명한 묘비명에 빗대어 표현하면 ‘장렬한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영어성경에 ‘이기다’란 의미의 ‘overcome’은 ‘무엇을~극복하였다’는 말이며 새로운 관계로 발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업그레이드 해주셨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얻은 ‘극복한 자’ 야곱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였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창32:31)
야곱은 얍복나루의 체험 이후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이스라엘’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격려에 힘입어 더 이상 두려움에 떨거나 속이는 자가 아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창세기 35장에 가서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창35:10)
야곱은 인생의 고비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했을 것입니다. “내 이름은 무엇인가? 내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고.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던 역사적인 장소는 이후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였다”(창32:30)는 뜻인 “브니엘(Peniel)”이란 이름으로 야곱의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실체요 본질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순종함으로 인해 신약에 이르기까지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Ⅴ. 끝맺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두려운 물음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공직이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후보를 선택하는 아무런 기준이 될 수 없는 슬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느끼는 비애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소중하게 간직할 줄 모르는 데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가의 고루한 피휘(避諱)의 전통을 우스갯거리로 여기듯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값없이 불리는 현실도 자조섞인 탄식으로 당연하다 해야 할까요? 그러기엔 우리는 이미 명목상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사신 너무 거룩한 백성이라고 낙인이 찍혀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흔한 이름에 힘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옛사람을 죽이는 표시로 우리의 엉덩이뼈라도 탈골을 시켜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말하고 다니며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마5:14)라고 한 것처럼 억지로 숨기려 해도 저절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의 실질이 없다면 그건 명칭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가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란 허울일지 모릅니다.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이름이 다 무엇인가요? 우리가 부르는 장미를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향기는 그대로인 것을
Romeo and Juliet(Act II, Scene 2)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자기 고백이 아니라 타인의 입을 통해 확증됩니다.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던 로마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한 것에서 이방인 최초로 예수의 정체성이 확정되었듯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수고로움보다 실천하는 용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이 힘겨운 밤을 보내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야곱은 그토록 두려워하던 에서를 만나기 위해 무리의 맨 뒤에서 가장 앞에서 쩔뚝이며 걸어 나갔습니다. 에서의 발 앞에 이르러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화해가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얍복나루에서 묵혀두었던 문제가 비로소 풀렸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창33:4)
우리도 그런 용기가 없다면 어쩌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한 것처럼 언젠가 호되게 우리의 엉덩이뼈를 탈골이 될 정도로 세차게 걷어차실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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