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계에서 읽는 성서

불의한 재물로 사귀는 친구

by 하늘밑 2024. 10. 21.

 들어가며

 

성경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75편 정도로 예수님의 대화에서 1/3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왕의 통치가 익숙하고 왕의 질서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무어인지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우리는 이끄는 관문입니다.
 
4월 9일, 총선을 하루 앞두고 한 야권의 대표가 마지막 밤 연설을 세종문화회관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했습니다. 촛불혁명이 있던 바로 그곳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야권의 대표를 에워싸고 환호했습니다. 그는 마이크를 쓸 수 없어서 오로지 육성으로 외쳐야 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는 검찰개혁과 정권심판을 넘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TV를 켜놓고 말씀 나눔을 준비하던 저는 집회를 보며 불현듯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유로 말씀하시던 현장을 떠 올렸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는 5000명 이상이 모였다 하지 않았습니까? 변변한 마이크도 없었던 그 시절,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마 조국대표보다 더 크게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았을까요? 곳곳에서 예수의 이름을 열광하고 옳소! 옳소! 를 외쳤을지 모릅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의 악함에 눌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대안이며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들이 경험에 보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수님이 택한 방식은 비유입니다. 그들이 보지 못한 그것을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익숙한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가 기대고 있는 것은 심오한 깨달음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풍경이다. 비범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일상적인 이야기, 예수는 일상의 창을 통해 영원을 바라본다.”(김기석, 청파교회)

 
오늘날 예수님의 비유를 읽으며 여러분을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김호경 교수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뒷목을 잡을 만큼 놀랐던 이야기에 나는 왜 놀랄 수 없는가? 수많은 비유를 들으면서 나는 놀란 적이 거의 없다. 비유에 대한 해석들은 단지 자본주의적 희망만을 쓸어 담기에 급급한 것처럼 보였다. 비유는 우리의 탐욕을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어디서든 부자가 되는 수백 가지 방법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예수의 찰진 비유를 듣고 놀랐던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들처럼 놀라고, 그들처럼 고민하며,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고 싶었다. 그들처럼 도전받고 싶었다.”
(김호경, 『예수가 하려던 말들』)

 
저의 부족한 식견을 널리 이해해 주시고, 바라기에 오늘 말씀 나눔을 듣고,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저와 함께 뜨거워지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비유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몇 줄 안 되는 이 비유를 놓고 지난 시절, 수많은 성경학자가 해석하느라 고민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 저와 여러분이 성경본문을 두고 하는 고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애초에 의미했던 바(what it meant)를 발견하지 않으면 그 분문이 지금 의미하는 바(what it means)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어려운 이유는 놀랍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일상에 낯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옛날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 나의 이야기가 되려면 조금은 조심스러운 사색의 과정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방금 읽은 본문을 떠올려 보십시오.
 

Parable of the Unjust Steward Marinus van Reymerswaele (1490-1546) / 빈미술사박물관

 
청지기란 주인이 뜻을 따르는 위탁관리인을 말합니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주인의 말을 듣고[聽] 정직하게[直]하게 행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비유에 나오는 청지가 같은 인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니면 그런 인물이 여러분과 동업을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대략난감일겁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청지기가 불의하면 주인의 입장에서는 파면이 당연합니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다면 그 임무를 위배한 행동을 한 것으로 오늘날 기준에는 명백히 배임죄에 해당합니다. 정상적인 주인이라면 불의한 행동을 한 청지기를 지혜 있다고 칭찬할 리 없습니다. 게다가 16장 9절,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니요? 예수님의 이 말은 더 이상하게 들립니다. 굳이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불의한 재물이 아니라 정의롭고 깨끗한 재물로 사귀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과정이 의롭지 못하다면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마태복음 5장에서 얘기했던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는 참 믿기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볼까요? 누가복음 16장 1절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또한”이라고 했으니, 앞에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3~7),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8~10),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잃은 아들의 비유(11~32)입니다. 모두 ‘되찾음’의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은 재물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1~13), 율법과 하나님 나라(14~18),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19~31)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전체 이야기의 중심 부분에 위치합니다. 15장이 16장과 별개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16장의 비유를 통해 15장의 비유를 좀 더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절부터 8절까지를 예수님의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비유는 4개의 장면이 교차대구적 구조(chiastic structure)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자주 이용하던 패턴입니다.
 
 
A (16:1-2): 주인과 청지기
  B (16:3-4): 청지기와 자신
  Bˊ (16:5-7): 청지기와 빚진 자들
Aˊ (16:1-8a): 주인과 청지기
 
8절 하반부부터가 예수님이 비유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장 8절은 비유와 해석을 가르는 중요한 분깃점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장8절)

 
예수는 8절 하반부를 통해 청지기의 지혜로움을 자신의 논리를 펴는 첫 단추로 삼고 있습니다. 비유는 주인이 이 청지기를 칭찬하였다는 말로 끝이 납니다. 청지기를 불의하다고 정의해 놓고 칭찬을 하다니 그냥 들어도 조금 엉뚱합니다. 신학자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이런 ‘엉뚱성’(extravagance)을 예수 비유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엉뚱한 비유의 결말로 인해 불의한 청지기는 단지 ‘부자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한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자신의 미래를 대비한 사람으로, 제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선택된 역할로 신분이 바뀌게 됩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 VS ‘빛의 아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절 하반부)

 
이 세대의 아들은 문맥상 ‘불의한 청지기’를 말합니다. 빛의 아들은 16장 첫 구절에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으니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잘 읽어 보면 예수는 이 비유를 제자들을 위해서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4)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꼼꼼하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비유를 들으며 ‘빛의 아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가 13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할 때도 ‘너희가’라고 한 대상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15장 첫머리를 참고할 때 예수님이 비유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에 모두 열려있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빛의 아들들’이란 복수 표현은 ‘제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모두 포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죄와 사망의 어두운 권세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돈을 탕감해 주는 청지기의 지혜로움을 돈을 좇는 빛의 아들들의 탐욕과 대조시켜 표현하였습니다. 비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듣던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키던 청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절로 이어지는 예수의 엄중한 질책은 그래서 따갑고 매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비유의 내용

 
누가는 예수의 자료를 수집하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장)’,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장)’, ‘삭개오 이야기(19장)’ 등을 복음서에 넣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공동체의 물질에 대한 당면문제가 심각하였음을 말해주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런 기록은 누가복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자본, 이 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민이 2000년 전에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누가가 예수의 말씀 중에 특히 부자와 가난한 자, 하나님과 재물에 관심을 모은 것은 교회 공동체가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세상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8절부터 13절까지 비유의 해석은 예수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 같지만 누가공동체의 바람을 반영할 것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청지기는 주인에게 내쳐지기 직전, 과감한 계획을 실행해 옮깁니다. 주인의 수익을 분배하였습니다. 빚진 자들에게 50%, 20%의 빚을 각각 탕감해 주었습니다. 청지기의 행위는 이기적이고 지극히 불의하였으나 객관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선하였습니다. 당시 대리인이 토지를 위임받아 고리대업을 일삼았던 고대 근동세계의 관행을 생각하면 대리인인 청지기는 주인에게만 불의하였을 뿐 물질의 분배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이루어졌으므로 정의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줄 때는 채권자같이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출22:25).

 
당시 부자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대리인을 고용하고 편법을 썼습니다. 처음부터 원금과 이자를 합산해서 꾸어주었습니다. 숨겨진 이자가 부과되는 것은 당연한 조건이었기에 채무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통상적인 이자는 25% 정도였다고 하는데, 위험부담이 클수록 이자율도 높게 부과되어 기름, 설탕, 소금 등 변질되기 쉬운 것에는 높은 이자가 책정되었습니다. 청지기가 탕감해 준 것이 원금이 아닌 이자였을까요? 기름 백말을 오십이라고 쓰게 하고, 밀 백석을 팔십으로 쓰게 한 것을 보면 빚진 자의 경제상황을 고려하여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경우는 주인의 원금을 탕감해 주었다고 보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이야기는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삭개오(Zacchaeus)라는 이름 뜻은 “깨끗한 자”란 뜻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니 아마도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업계의 기준과 윤리를 나름 잘 지켰던 인물 같습니다.
 
부자가 청지기를 해고하려고 한 이유는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청지기가 자기 재물을 원금보다 불리길 원했을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았던 종을 책망하는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부자 주인의 입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눅19:26~27)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 준 행위는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어리석은 종과는 다릅니다. 비유의 결말이 16장 13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는 말에 집약된 것을 보면 청지기는 재물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빚진 자에게 나눠줌으로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재물의 사용이 어떠해야 함을 궁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재산을 불리지 않고 오히려 손해를 끼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청지기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빚진 자들과의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인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비유 속의 주인은 청지가 빚진 돈을 탕감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니 그걸 구실로 청지기를 꾸짖을 수 없었습니다. 구약의 정신을 지킨 물주로 자신의 명예가 높아졌을 것이니 차용증을 다시 쓰게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는 청지기가 괘씸했겠지요. 아마 속으로 “요놈 제법이네!”라고 했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였을지언정 주인의 명예라는 자산은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빚을 탕감받는 사람들은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 준 것이 주인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비유의 교훈을 이렇게 풀어서 말합니다.

“그들은 늘 빈틈이 없고, 온갖 수단을 꾀하며, 수완을 발휘해서 살아남는다. 나는 너희도 그런 식으로 옳은 것을 위해 영리해지기를 바란다. 모든 역경을 생존을 위한 창조적인 자극제로 삼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너희 관심을 집중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선한 행동에 만족하면서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살게 될 것이다.” (눅16:9)

 
 

불의한 재물이란?

 
이제 가장 난해하다고 하는 9절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이 구절이 어려웠던 이유는 불의한 재물을 사용하라고 해놓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한 비유의 결말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무엇일까요? 영어성경인 NIV는 나름 고민을 하였는지 불의한 재물을 “세상의 재물(worldly wealth)”로 번역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부정한 돈’,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돈’이 아니라 ‘세속적인 부’로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반문하게 됩니다. ‘재물’을 쌓는 것이 잘못입니까? 의로운 방법으로 부를 창출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6장 13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은 속성상 양립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불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디키아(Adikia)’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불의한’, ‘믿을 수 없는’의 뜻을 가진 ‘아디코스’에서 왔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의한 재물’은 ‘하나님과 대비되는 것’, ‘믿을 수 없는 대상’이 됩니다. 초기 기독교는 재물 자체를 하나님과 병립할 수 없는 불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재물은 신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에 들어있습니다. 당시 누가의 공동체가 재산형성 과정에서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섬겼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내에 빈부의 격차가 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동산 사업을 하거나 영리를 목적으로 돈과 거래가 오가는 사교의 장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많이 합니다. 묘한 기시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청지기에게 친구는 누구였을까요? 맞습니다. 친구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이었습니다.(4절) 청지기의 직에서 쫓겨났을 때 빚진 자들이 청지기를 맞이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는 말을 곰곰 생각해 보면 그 친구란 최종적으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에 지극히 작은 자, 가난한 자, 즉 사회의 소외된 자에게 한 것이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했으니 누가가 예수의 말을 빌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비유의 해석에 등장시킨 부분이라고 추정이 됩니다. 친구란 믿을 수 없는 대상인 세상의 재물로 섬겨야 할 자들일 것입니다. 비유는 말합니다. 그들을 친구로 사귀면 그들로 말미암아 ‘영주할 처소로 영접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재물이 없어질 때’란 언제일까요? 돈과 함께 왔다가 돈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아닐까요?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6장 19절에서 31절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16장 9절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부자는 지옥의 불꽃 속에서 거지 나사로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누가복음은 부자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죄는 자신의 대문에 누워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무관심입니다. 부자는 남아도는 자신의 불의한 재물을 나사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을 위해 썼습니다. 부자는 자신에게 부유하였으나 하나님께는 부요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에 마음을 두었던 부자는 자신을 위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친구, 나사로와 같은 가난한 친구를 사귈 수 없었기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0~21)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8절 초반에 나온 부자는 지혜로운 청지기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질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청지기가 지혜로운 것은 주인의 많은 재물이 결국은 수많은 빚진 자들의 의무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반드시 나눠야 할 재물이었습니다. 청지기는 그 점을 파고들었다고 봅니다. 청지기는 인간의 법보다는 하나님의 법에 자기 행동을 일치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이 자기 재물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인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무모하게 빚을 탕감해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청지기의 획기적인 발상은 빚진 자를 살리고, 본인을 살리고, 주인을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표면적으로 현명한 물질 사용에 관한 권고로 보입니다. 그게 다일까요? 청지기의 비유는 그 뒤로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의 이야기에서 누가복음 16장은 임박한 종말의 때에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공동체가 보기에 엄혹한 로마제국의 통치시기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종말의 때였습니다. 율법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새로운 통치의 시대에는 불의한 청지기의 위기의식과 지혜가 필요했으리라 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6)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재물을 움켜쥐고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변치 않는 하나님을 믿는 나라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12:17)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사모하는 세상입니다. 초대교회 수많은 교인이 자기 재산과 양식을 내어 서로의 필요만큼 채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영주할 처소’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라고 했으니, 예수는 ‘영주할 처소’를 지금 현실에 임하여 있고 피부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지금 여기 있음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막1:15)로 요약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대한 비유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빚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는 것이 지혜라니, 이런 세상을 당시 사람들이 경험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는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놓치지 말하야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청지기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모든 방편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는 선했지만, 과정은 불의했습니다. 청지기는 그런 의미에서 전혀 선하지 않습니다. 조연처럼 숨어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청지기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아닐까요?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롭다 칭찬한 사람이 바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결단은 주인의 인정으로 마무리됩니다. 청지기가 아무리 차용증을 바꾸어 쓰더라도 주인이 원천무효를 주장하면 효력을 잃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주인의 칭찬은 청지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빚진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진정한 반전은 청지기가 짜낸 지혜로운 방안이 아닙니다. 비유의 핵심은 청지기가 채무를 탕감한 것이 아니라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칭찬에 있습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함으로 주인의 질서가 무엇이고 주인의 관심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여준 데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적용하면 누가복음 15장의 끝부분,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일컫는 이야기의 실질적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탕자일까요? 그의 아버지가 아닐까요? 그래야 16장의 비유와 맞아떨어집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이 평생 번 재산의 일부를 자신의 작은 아들에게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그 재산은 세상의 재물이고 불의한 재물입니다. 그 돈은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한 생활로 버려지는 것이나 다름없이 사라졌습니다. 명백한 재산상의 손해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는 아낌없이 그 재산을 써 버립니다.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 결과 탕자가 저 스스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불의한 재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부자 주인이 청지기가 탕진한 돈으로 자선을 베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를 욕한 것은 큰아들이었습니다. 큰아들은 16장에서 예수의 말을 비웃은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잃어버린 한 사람, 한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버린다 해도 절대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파격적으로 누가복음에 등장한 이유는 아마 당시 누가 공동체에 죄인들의 회개가 줄로 이어지고 평소에는 상종하지 못하는 최하층 노예나 세리들도 공동체에 들어왔을 것이고 추측이 됩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교회와 만찬가지로 내분이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내쳐야 할까요? 그들은 너희 친구다!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비유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청지기의 주인처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이라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들에 둔 아흔아홉 마리의 양, 아홉 드라크마에 만족하지 않고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지는 어떤 여자의 비유도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과 아홉 드라크마는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낭비가 아닙니다. 청지기의 지혜로 살아난 빚진 자들은 내 버려진 사람들이 아니라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고,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이고, 돌아온 탕자입니다. 그들을 친구로 만들면 우리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주할 처소’,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는 공동체가 어떻게 잃어버린 영혼을 품을지, 재물을 무엇을 위해 써야 할지를 예수의 비유를 통해 명확하게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해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누가복음의 한 복판에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말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이 비유의 의미를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는 다르게 그날, 그 현장에서 바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돈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4)

 

정리하며

 
예수의 비유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불의한 청지기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유 속에 나오는 주인과 청지기에 대해 너무 현실적인 이해를 투사하는 것은 좀 무리한 발상이긴 하나 어느 정도 추측해 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정말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을까요? 부자는 다시 청지기를 고용하였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애초에 청지기를 해고하려고 했었습니다. 주인을 속인 청지기는 주인의 칭찬을 받긴 했으나 그것이 청지기에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지혜롭다는 칭찬은 청지기에게 윤리적인 면제권을 준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주인의 명예는 높인 것과는 별도로 배임 사기 등의 이유로 막대한 돈을 물고 해고되지 않았을까요? 청지기가 의지해야 할 사람은 결국 불의한 재물로 사귄 친구들, 자신이 빚을 탕감해 준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재물이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쌓은 재물은 성경의 시각으로 보면 ‘불의한 재물들’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의 재물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알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2천 년 전에 선포되었고 지금도 누구나 그 나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누가가 살았던 시기의 교회공동체는 로마제국의 피식민지 현실 속에서 자치와 공생의 공동체적 삶을 박탈당하고 그 안의 사람들은 생존의 위기로 내몰렸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요? 성공에 매몰되어 성장을 추구하던 우리의 가치를 뒤집는 일은 무능력한 패배자로 보일 것 같은 두려움을 줍니다. 때로는 실패를 미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삶으로 걸어가라고 권면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용서와 화해, 하나님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해묵은 존 롤스(John Rawls)의 공정적 정의관이나 한 때 유행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뒤적이지 않더라도 예수임은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자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 할 처소로 영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