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디자이너 서라이야기
갑작스럽게 쏟아진 눈을 맞으며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삼성역 사거리에 자리한 미용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은 생애 첫 헤어 염색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아빠와 미용실을 찾는 딸, 흔치 않은 조합이 분명했지만 그렇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염색하고 싶으면 아빠가 아는 미용실에 가볼래? 거기 실력 좋은 헤어디자이너가 있어. 그런데 말이야, 그 디자이너가 바로 아빠 제자거든. 아마 무지 잘해줄걸?”
나는 제자의 인스타그램까지 슬쩍 보여주며 말을 건넸다. 딸은 아무 말 없이 화면을 훑어보더니 어느 날 덜컥 온라인 예약을 해버렸다.
“아빠, 나 거기 갈래. 삼성역 미용실.”
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제자 서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서라는 ‘대박!’이라며 신기해했고, 오랜만에 제자를 직접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나 역시 딸 못지않게 설레었다. 지하철을 타고 삼성역에 도착하자, 출구 너머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건물 입구와 보도에 쌓인 눈을 부지런히 쓸어내고 있었고, 저 멀리 파리크라상의 은은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층, 따뜻하게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미용실로 들어서자 널찍한 공간이 펼쳐졌다. 영화 「인턴」 속 앤 해서웨이의 사무실처럼 세련된 분위기였다. 부드러운 황금빛 조명이 따뜻하게 퍼졌고, 거울마다 반사되는 은은한 불빛이 공간을 더욱 넓고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천장에는 노출된 파이프들이 얽혀 있어 모던한 감성이 한층 돋보였고, 하얀 타일 기둥 뒤로는 우드톤의 가구들이 포근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거울 앞, 정갈하게 정리된 미용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미용실이 아니라 변화를 꿈꾸고, 스스로를 새롭게 단장하는 작은 의식이 이루어지는 신성한 공간 같았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았다. 폭설 덕분에 당일 예약이 줄었다고 했다. 잠시 후 한 스텝이 다가와 음료를 권했다. 커피와 오렌지주스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멀리서 서라가 나타났다.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얼굴이 부어서 마스크를 써야 해요. 죄송해요, 선생님.”
서라가 사진과 함께 보냈던 톡이 생각났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서글서글한 눈매, 매력적인 목선과 단아한 몸매. 마스크를 쓴 모습도 예뻤다.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마치 어제 본 듯 자연스러웠다. 한참을 서서 이야기했다. 곧이어 뒤에서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딸을 소개하며 머리를 부탁했다.
멀리 앉아 서라가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선생님, 저 멋진 헤어디자이너가 될 거예요! 그때 꼭 선생님 머리를 해드릴게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어린 서라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제자의 꿈을 현실로 보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딸은 빨간 머리 앤처럼 너무 강렬하진 않게, 은은한 와인빛이 도는 레드 버건디 컬러를 원했다. 서라는 곧장 샘플 사진을 보여주며 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냈다. 먼저 커트를 하고, 그 후 염색을 하기로 했다.
서라는 허리춤에서 가위를 꺼냈다. 야무진 손길이 공기를 가르며 가위가 춤을 추었다. 딸의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가위질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리듬과 함께 머리가 새로운 형태를 찾아갔다.
“와, 정말 잘한다!”
디자이너 실장에게 ‘잘한다’라니 말을 내뱉고 바로 후회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서라는 특유의 입담으로 싱긋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아무나 못해요. 이렇게”
염색이 시작되었다. 밀도 높은 블루베리 빛 염색약이 붓끝에 묻었다. 어두운 머리칼이 서서히 변해갔다. 고요한 저녁 바다처럼 깊이 있는 색감이 퍼져갔다. 서라는 몇 가지 염색약을 섞어 자신만의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래야 색이 머리카락 깊숙이 스며들어 샘플 사진처럼 나올 수 있어요.”
전문가다운 대답이었다. 순간 깨달음이 왔다. 서라는 단순히 머리를 자르고 색을 입히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헤어디자이너로서 자신을 찾아오는 고객에게 조금 더 새롭고, 조금 더 의미 있는 하루를 선물하는 사람이었다. 서라의 손끝에서 누군가의 변신이 시작되는 것이다.
염색을 마친 딸은 거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10년이 넘는 경륜의 손길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작은 기적이었다. 머리를 마치고 서라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처에서 일하던 또 다른 제자 은아까지 합류하여 대화는 더욱 흥겨워졌다. 우리의 공간이 사진으로만 보던 뉴욕 브루클린의 아름다운 카페처럼 느껴졌다. 창밖에는 어느새 눈이 그쳤고, 도로 위 자동차 불빛이 저녁 바다의 노을처럼 아스팔트 위로 번지며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서라는 우리에게 유리창 밖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저 아래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면 맛집이 있다고 추천해 주고,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오며 배웅했다. 더없이 고마웠다.
“우린 갈 테니 더 나오지 말고 어서 들어가.”
서라를 돌려보내고 미용실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봤다. 내가 예전에 봤던 어린 서라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한층 더 커 보였다. 그렇게,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 딸은 새로운 머리빛을 얻었고 나는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서라는, 오늘 또 한 사람의 인생에 따뜻한 기억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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