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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인생

오보에 협주곡과 베네치아

by 하늘밑 2024. 10. 14.

오보에 협주곡과 베네치아
Alessandro Marcello, Oboe Concerto in D minor

1. 오보에 협주곡

오보에 하면 아무래도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라는 곡이 떠오를지 모르겠습니다. 그 악기 맞습니다. 오보에는 높은 소리를 내는 목관악기로 바로크시대 대표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겹리드를 부느라 연주자의 얼굴이 밤볼 모양으로 붉게 상기되고 부는 구멍이 좁은 탓에 숨이 조금밖에 안 들어가 불다가 숨이 고빗사위를 넘기기 쉬운 고난도의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을 통해 나오는 소리는 다른 악기에 함몰되지 않고 귀에 무척 잘 들립니다. 저음역대는 묵직하고 두텁고 중음역대로 갈수록 콧소리가 섞인 듯 감미롭고 우아합니다.

알렉산드로 마르첼로(Alessandro Marcello, 1669~1747)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Oboe Concerto in D minor>, 오보에 협주곡하면 알비노니를 떠올리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바로크 오보에 협주곡을 대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르첼로의 오보에 곡에 매료된 바흐는 마르첼로의 악보를 필사해 챔발로를 위한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게 “BWV 974”입니다. 챔발로의 특성상 바흐의 편곡은 장식음 사용이 많고 8분음표를 16분음표로 바꾸어 짧은 음가의 음표들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었습니다. 꾸밈음이나 트릴 등이 많으니 템포의 변화가 좀 더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아하~ 바로 그 음악이구나” 할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오보에 연주가 들려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따라잡지는 못합니다.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는 전체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연주시간은 10분을 조금 넘습니다. 1악장은 안단테에 스피카토(Andante e spiccato)로 오보에가 말하듯 연주를 이끌고 현악기가 이어받는 형식입니다. 챔발로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무르익습니다. ‘리토르넬로(ritornello)’형식으로 주제선율을 반복합니다. 처음에 D단조로 시작하여 F장조, A단조를 거쳐 D단조로 돌아오는 식이죠. 비발디의 <사계>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에서 자주 듣게 되는 형식입니다. 고전 시대에 확립된 소나타의 초기 형식입니다. 2악장은 아다지오(Adagio)로 오보에 연주의 백미(白眉)라고 일컫는 악장입니다. 아다지오의 애잔한 선율이 계단을 밟듯 적막한 현악기 반주 위에서 ‘칸틸레나(Cantilena)’라고 하는 서정적 선율을 연주합니다. 요술피리에 홀린다고 표현한 부분이 바로 2악장입니다. 듣고 있으면 손 모으고 회개하지 않아도 마음이 깨끗해진다고나 할까요.^^ 3악장은 프레스토(Presto)로 오보에가 주도하는 가장 강한 악장입니다. 춤곡풍이라 리드미컬하고 장조와 단조를 반복하며 힘 있고 긴장감 넘치게 연주합니다. 찌그러진 진주 같은 불협화음이라고 바로크음악을 폄하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곡입니다.

저는 오보이스트로 하인츠 홀리거(Heinz Holliger, 1939~ )의 연주를 좋아하지만 데카에서 나온 베를린 필의 알브레히트 마이어 (Albrecht Mayer, 1965~ )의 연주도 좋아합니다. <알브레히트 마이어 인 베니스>라는 CD는 앨범커버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유튜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마르셀 퐁셀레(Marcel Ponseele)의 연주입니다. 들어보시면 좋겠네요.

2. 베네치아의 짧은 추억

마르첼로가 작곡한 오보에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르첼로의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간 듯합니다. 마르첼로뿐인가요? 알비노니와 비발디의 고향이기도 하죠.

저는 아내 덕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2년 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머물면서 슬로베니아 블래드를 거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가려던 계획을 검토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내가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베네치아는 보고 갈 거지?” 구글 지도를 보니 베네치아를 들렀다 잘츠부르크로 가려면 험준한 돌로미티와 해발 3,798미터의 알프스 산자락, 글로스그로크너를 넘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정이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좀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렌터카 여행이 좋다는 게 뭐야. 가고 싶은 곳에 맘대로 갈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아내가 가시눈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내의 얼굴엔 볼드체로 “딴생각하지 마”라고 쓰여 있었고요. 대놓고 낭만적인 아내의 결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곰상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거였습니다. “나도 진작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ㅎㅎ”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비싼 주차료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사실 ‘베네치아’라는 네 글자에는 묘한 끌림이 있었습니다. 베네치아를 돌아다니며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는 물론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와 <베니스의 상인>을 떠올렸습니다. S자로 굽어진 운하와 미로 같은 속 길을 지날 때는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베네치아에 머물렀을 두 주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007 카지노로열>에서 다이엘크레이그와 에바그린이 요트를 타고 누비던 곳이 어디였나 계속 두리번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하게 인근 섬 길가 카페에서 영화배우 유해진 씨를 만났습니다. 일행과 함께 와인을 몇 병 마셨는지 오보에를 분 것처럼 양 볼이 붉게 변해있었습니다. 악수와 함께 가볍게 포옹을 했습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놀랄 일도 많은 딸이 물었죠.

“아빠, 친구였어?” “그러게 여기서 다 만나네ㅎㅎ”

해질 무렵 산마르코 광장 구석에 앉았습니다. 18세기 바로크 시대로 돌아간 듯 황홀한 기분이었습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벽화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람들에게 들려 내려오고 있었고 종탑은 희뿌연 햇살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MP3를 꺼내 하인츠 홀리거가 연주하는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2악장>을 들었습니다. 하르르 비둘기들이 솟아올랐고 광장의 사람들은 멈춘 듯 보였습니다. 소리가 소리를 타고 또 소리를 말면서 다시 이어지는 소리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CEkAFL53k4

 
Alessandro Marcello (1684 - 1750) Concerto in D minor for Oboe, Stringa and Continuo 알레산드로 마르첼로 오보에, 현과 콘티누오를 위한 협주곡 D단조
II. Adagio
Oboe: Heinz Holliger 오보에: 하인츠 홀리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