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것
성경본문: 마태복음 25:14~30
예수님의 비유 설교는 신약을 통틀어 75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모든 비유를 관통하는 주제는 실현되고 있는 종말인 천국,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4:11)일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예수님의 이런 목표는 당시 딱딱한 강론이 아니라 비유라는 효과적인 도구를 통해 쉽게 대중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4:33~34)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비유를 해석하고, 또 예수님이 해석한 것을 또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지요.
마태복음 5개의 설교
마태복음은 주후 8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5개의 설교가 등장합니다. 베이컨(BW Bacon1860~1932)이란 신학자는 『마태복음연구』(Studies in Matthew)』란 책에서 5개의 설교가 구약의 ‘오경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오늘날 대부분이 이 주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5개는 산상수훈(5~7장), 선교사역에 관한 설교(10장), 천국비유 설교(13장), 천국 백성에 관한 설교(18장), 종말에 관한 설교(24~25장)이며 각각의 설교는 동일한 종결 후렴 문구인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로 끝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달란트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들어 있으며 위와 아래 다른 비유와 한 묶음입니다. 본문의 앞 구절인 마태복음 25:1~13절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뒤 구절인 마태복음 25:31~46절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등불의 기름을 사러 갔다가 늦어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원한 형벌에 해당되는 왼편으로 분류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는 모두 재림 및 심판,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했으니 이제 달란트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만큼 흔한 설교도 없기에 어디서 다 들은 얘기 뭐가 특별할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새롭게 깨달은 것도 있고 해서 잠시 수다를 떨어볼까 합니다.
달란트 비유의 내용
마태복음 25: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의 돈을 맡겼습니다. 맡긴 돈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액수입니다. 당시 금은의 중량인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약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으로 지금 가치로 6~7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옛날 주일학교에서 잠시 교사할 때 어린 학생들과 달란트 잔치를 했는데 학생마다 달란트를 2~30장씩 나눠줬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니 엄청 큰 금액이었습니다. 주인은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렇게 차이를 둔 이유는 종들의 능력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들은 단순히 힘든 일만 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 같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인이 이렇게 큰돈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종도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향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이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았습니다. 주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29~30)
달란트 비유의 이해
CBS에서 방영하는 성서학당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이 나와서 강해설교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 대형교회 김00 목사님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꾀나 설득력 있고 재미있게 비유를 풀이했습니다. ‘달란트’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재주, 재능, 직분’입니다. 주인은 종의 자질과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나눠주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 사용에 대한 전적인 자유를 위임했습니다. 달란트는 주인의 분신입니다. 달란트는 주인이 부재한 상황에 종들이 주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며 연결고리입니다. 우리는 ‘달란트’라는 하나님의 소유를 ‘은사’라는 이름으로 위탁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의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재능이 출중한 ‘창조적인 소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만큼의 재능은 없지만 주인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였기 때문에 칭찬과 보상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일치하였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재주가 조금 덜한 보통 사람을 격려하는 배역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무자비하고 냉혹한 악덕 장사꾼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주인을 무서워한 나머지 안전 제일주의, 소심증, 복지부동하였고 거룩한 배짱이 없어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율법보존과 전승에만 몰두하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을 비유합니다. 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소유까지 빼앗겼을까요? 교회에서 직분을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더 많은 직분을 맡게 되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있는 직분을 남이 가져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달란트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처럼 가꾸고 계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실패를 각오하며 거룩한 모험과 시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40분에 이르는 설교는 듣고 있던 네 명의 패널이 짓는 환한 미소와 탄성으로 끝이 났습니다. 아마 네 명이 패널은 마음속에 자신은 적어도 두 달란트 받은 종 정도는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 설교는 제가 지금까지 익히 들어온 달란트 비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에 이런 설교는 나름대로 감동은 있지만 은사를 달란트와 동일시함으로 인해 은사론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은사를 활용하지 않으면 가지고 있던 은사를 발휘할 기회까지 남에게 빼앗긴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좀 억지주장입니다. 세상에 자기가 갖고 태어난 은사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축구 잘하는 사람은 달란트로 받은 축구은사를 사용하기 위해 나가기 싫은 조기축구라고 해야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어디 가서 그림 그리기 봉사활동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그런 달란트 은사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아닌가요? 그건 개인의 선택입니다. 하물며 달란트 비유를 들은 신자들이 자기도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부담과, 그렇지 않으면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휩싸인다면 그것만큼 율법주의가 없을 것입니다. 은사의 활용은 끝까지 자발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의 어떤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자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그런 의미에서 달란트나 은사, 이익을 남기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또 하나 제가 주목하는 것은 주인이 종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주인의 태도는 상벌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에 매우 정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태도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비판의 여지가 많습니다. 우선 이 주인은 종들에게 돈을 맡기면서 어떤 지침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한 것은 달란트를 나눠주고 그냥 떠난 것입니다.(25:15 하반절) 속 마음으로야 장사를 해서 내 돈을 좀 불려봐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일절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돈을 불려 장사라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면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절대로 달란트를 땅에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장사를 했을 겁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을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는 자기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할 줄도 모르는 장사를 했다가 원금을 잃게 되느니 차라리 원금이라도 잘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마저 잃어서 주인이 손해를 보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게 뻔합니다. 종들의 일반적인 속성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위의 설교대로 한 달란트 받은 종만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비유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장사를 못하여 재산을 탕진하고 파산하였다면 주인이 종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비유의 결말은 성경의 기록과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습니다. 재산을 땅에 감추는 것은 그 당시에 재산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돈을 벌지 못했으니 잘한 게 아니지만 종의 순수한 동기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게다가 주인은 이자를 받기 위해 돈 굴리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한 달란트를 고리업자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았냐고 종을 나무랐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 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마25:27)
유대 율법에서 이자를 받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이자라는 말을 언급하는 순간, 주인은 악덕 장사꾼처럼 보일 개연성이 충분해 보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갔습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종은 옆에서 두 배의 돈을 남긴 동료들이 칭찬을 받은 걸 보면서 뭔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자책하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주인이라고 한다면 돈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이미 다른 두 종들이 돈을 충분히 남겨서 기분도 좋으니 이 세 번째 종을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을 겁니다.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너는 뭐를 하지 않아도 사랑받기에 충분해하면서 말입니다. 자 기분 풀고 같이 잔치에 참여하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하나님을 비유하였다면 하나님은 욕심꾸러기 구두쇠이며 폭군일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숨겨진 이야기
달란트 비유를 이렇게까지 삐딱하게 봤으니 일반적인 이야기로 읽으면 곤란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용불용설까지 들먹이며 없던 은사까지 짜내어 계발해야 하는 교회생활에 달란트 비유를 적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입니다. 저는 달란트의 비유를 종말과 구원이라는,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두었던 종은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다시는 회복 불가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왜 이런 무리하고 극단적인 비유를 제시하는 것일까요? 결론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마태 공동체가 처한 가장 엄중한 현실은 예수 재림의 지연이었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재림 공동체라고 이름을 붙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가나 요한의 공동체도 사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수난을 이겨내며 고통을 날을 참고 참아내며 예수의 부활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특히 주후 70년 경에 벌어진 로마와의 유대전쟁은 성전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재림을 기다리는 열망에 불을 끼얹었습니다. 당시 예수공동체는 모두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행1:10~11)
바울의 편지에도 그날이 가까이 임했다는 표현은 매우 흔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은 감감무소식입니다. 만약 마태 공동체에 찾아가 “당신이 기다리는 예수의 재림은 최소 2000년을 기다려야 해 그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예수를 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암튼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언제까지 필요에 따라 물품을 나누고, 모여서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겠습니까? 신앙심이 이완되기 시작했고 종말은 정말 있는지 회의감과 절박감이 공동체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징조는 별로 보이지 않고 박해는 오히려 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은 주변에서 하나, 둘 죽어갔습니다. 공동체에 이렇다 할 교리도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교에서 율법을 강조하는 바리새파운동이 과격하게 일어났고 마태 공동체는 예수가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변해야 했습니다. 점차 공동체 안에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의 선택은 자명했습니다. 지금은 공동체의 위기다. 재림과 심판이 곧 닥친다. 주인이 곧 돌아온다. 주인이 오시면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날과 시간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는 것과 누가 심판에서 영원한 형벌을 피해 영생의 길로 갈 수 있을지 명확한 기준을 알기 어렵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가 심판에서 구원을 얻는가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에서는 천국의 초대를 거절당한 이들이 나옵니다. 모두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 구원에서 배제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읽다 보면 그들은 사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들은 막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처럼 열심히 구원에 동참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과 함께 신랑이 너무 늦게 와서 졸다가 같이 잠들었어요. 딴짓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등불의 기름이 모자라 잔치에 들어갈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신랑이 이렇게 늦게 올 줄 알았다면 기름을 좀 더 넉넉하게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냉혹했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 25:11~12)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에 속한 이들도 나름 주님을 섬기며 할 만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25:44~45)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역시 나름 무심하게 떠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해 주인의 재산을 지켰을 뿐입니다. 열 처녀 중에서 버림받은 다섯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너무나 억울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하고 말입니다. 얼마나 더 해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신랑이나 주인이나 임금은 모두가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야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형평성에 맞지 않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구원의 처절한 배타성
일반 법정이라면 판결을 예측할 수 있는 판례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에는 판례도, 일정한 기준도 없는 듯 보입니다. 심판은 우리 노력의 정량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를 다니며 특별새벽기도회에 개근하고, 장로가 되어 직분에 충성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적 베이스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신앙적 기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있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렇다면 달란트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달란트를 주인의 의도대로 잘 활용하라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주인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였습니다. 종에 대한 판결은 오로지 주인의 독단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결정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의 독단, 그 구원의 배타성은 심판의 기준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객관성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무시해 버립니다. 마치 주인 마음대로 심판의 대상에게만 속한 고유한 개별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처럼 보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 내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한 책망, 그리고 한 달란트마저 빼앗는 선고는 주인과 종이라는 1대 1의 관계에서 사람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하반절)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하나님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속적인 시도뿐입니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욕망일 수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응시하면서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결정적인 실수가 무엇일까요? 달란트를 땅에 묻어 주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의 존재를 잊었습니다. 나머지 두 종은 달란트를 불리며 언젠가는 나타날 주인의 존재를 잊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실수는 주인을 함부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주인을 가리켜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했으니까요. 겉으로는 주인의 속성이 어떻고 하면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말입니다. 주인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안도감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주인은 돌아왔고, 그는 쫓겨났습니다.
조물주를 우리의 생각 안에 담으려는 일체의 노력은 헛수고입니다.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찰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자신의 때에,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돈이나 재능을 나타내는 ‘달란트’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이란 말일지 모릅니다. ‘착하고 충성된’은 종의 판단이 아닙니다. 주인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파격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던 세리장 삭개오는 구원의 기쁨을 현장에서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배타적 판단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기존의 가치 질서를 뒤집는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울로 우리를 달 듯 객관적으로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마태 공동체는 종말론적 신앙의 긴장과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주인의 속성이 어떻고 하면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요? 예수의 재림은 주후 80년이 아니라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오스카쿨만(Oscar Cullmann)이 말한 ‘시작된 종말론’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와 아직(already or not yet)이라는 심판의 중간지대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까요? 그것은 영원한 꿈 아닌가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마태공동체는 그나마 불안감이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은 그것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심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종말의 날을 기다리며 흰옷을 입고 공중에서 구름 타고 임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냥 살아내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나중에 지구를 버리고 천국에 이사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예수께서 보여주신 정의와 평화,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구현하는 일에 부름받는 사람들이다. 그 길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고 부르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름답기 때문에 제자라고 부르고 성도라고 부른다.” -자유인 교회 이현우 목사의 글에서-
다행히 달란트 비유처럼 주인이 오기까지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주어지기만 했을 뿐 그것으로 어떻게 하라는 요구는 없습니다. 예수 재림과 심판의 때는 모르지만 적어도 달란트를 쓸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라는 정답은 없습니다.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면 됩니다. 핵심은 다섯 달란트 받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의 자유로운 선택이 주인을 만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두 종은 주인의 심판에서 살아났고 주인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웃자고 얘기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부터가 모두 종말입니다. 구체적인 때는 모르지만 우리 인생에서 종말의 징후는 쉽게 보입니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생기를 잃어가면서 우리의 생명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습니다. 우린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인류라는 종도 그렇고, 지구가 포함된 태양계도 그렇고, 우주 전체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예수의 심판과 재림은 위르겐 몰트만(1926~2022)이 주장한 희망의 종말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고, 희망이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며 앞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또한 그러므로 현재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중에서
성경은 분명하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심판은 두렵지만 기쁨의 날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의 소멸을 의미한다기보다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는 날입니다. 우리가 주인의 달란트를 위탁받은 종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는 다섯 달란트를, 누구는 두 달란트를, 누구는 하나의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주인은 달란트만 던져주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처럼 달란트를 땅에 묻어둬야 할까요? 그것은 주인과의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장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의 두 종은 재주가 좋아서 두 배의 수익을 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운명은 주인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장사를 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장사라는 게 양면성이 있어서 주구장창 이익만 남기는 그런 장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 종은 겁도 없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할 듯합니다. 주인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믿는 이들만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중간에 장사가 망한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려고 했는가가 중요하고 주인의 존재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판단은 전적으로 주인의 몫입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까 없을까는 우리의 판단을 벗어납니다. 성경말씀이 그저 해석을 기다리는 글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밝혀주는 길이 되려면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의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방식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세상에 끝이 없다는 사람에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마태복음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에서만 효력이 있지 지금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지만 분명히 구원의 핵심이 무엇인지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개인과 공동체가 처한 자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특별합니다. 그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만나신 바로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특별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만나실 것입니다. 주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남은 인생에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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