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이야기를 시작하며
인류가 역사상 진리라고 굳게 믿던 것이 무너졌던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을 비롯한 천체의 모든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던 천동설, 이것을 뒤엎어 버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입니다. 당시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수도사는 종교재판에서 화형을 당할 때입니다. 지동설이 사실로 입증되자 인류는 하루아침에 우주의 중심에서 태양계의 변방으로 추방당했습니다.
두 번째 충격이 인류를 곧 덮쳤습니다. 은하계의 변두리라도 지구에서만큼은 만물의 영장으로, 고귀한 신성을 물려받았다고 믿었던 인류는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면서 또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없이 열등하고 측은하게 바라보던 동물원 우리 속의 원숭이를 같은 조상으로 공유하다니......인류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세 번째, 진화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나 자신의 주인은 나다’라는 인류의 마지막 자부심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회복불가의 상태로 전락하였습니다. 무의식은 내 속에 살고 있는 통제불가의 타인이니까요.
위 세 가지 예에서 인류가 믿던 진리는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 사실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나눔의 주제는 ‘로마라는 키워드로 살펴본 진리라는 편견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저는 누구에게 큰 깨달음을 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평소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듯 말해 보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는 상식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잊고 있었던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을 겁니다.
유대와 로마의 전쟁
AD 92년,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의 11대 황제 자리에 즉위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권좌를 강화하고 거대한 로마제국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수단으로 모든 로마시민이 자신을 ‘주님이자 하나님’(Lord and God, 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게 합니다. 로마제국을 ‘영원한 제국’(Eternal Empire), 자신의 이름을 ‘영원한 왕’(Everlasting King)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황제의 우상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황제숭배는 그들이 믿는 신 외에 또 다른 신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어서 신앙심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과 같은 제자들에게는 황제숭배는 유일신 신앙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 절대 죄악이었습니다.
로마의 유대에 대한 핍박은 AD64년, 로마에 대화제가 발생하자 그 원인을 기독교도들에게 돌려 대학살을 자행한 네로황제부터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는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포함한 유대 전체가 로마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나서도 몇 백 년 간 계속 이어졌습니다.
AD70년 제1차 유대와 로마의 전쟁 당시, 유대 병력은 약 2만 3000명이었던 것에 비해 이에 대항하는 로마군은 무려 8만 명을 넘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때 80년 동안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지 딱 10년 만에 벽 한 면만 남기고 방화로 사라졌습니다. 전쟁의 참상은 처절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무차별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인들과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유대인 240만 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110만 명이 살육당하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유대교는 사제계급이 사라졌고 랍비가 이끄는 평신도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난공불락의 요새 마사다에서 로마와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960여 명의 유대인들은 함락을 앞두고 자살을 죄악시하는 유대의 전통을 따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이렇게까지 로마에 맞서 싸웠던 민족은 유대인들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포로로 끌고 가서 장대한 개선 행렬을 벌였습니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화폐를 주조했고 로마 역사상 최초로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현재 로마의 포로 로마노 인근에 세워진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당시 성전에서 일곱 개의 촛대(메노라)를 비롯한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잡혀간 유대인 노예들이 건설한 것이 AD 80년 완공한 콜로세움입니다. 오늘날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절반이 죽어나간 제1차 유대전쟁의 전운 속에서 성경의 첫 복음서가 쓰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작시기가 대략 67~70년경이니까요. 복음서는 이상하리만큼 유대인들의 당시 상황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유대의 독립을 꿈꾸는 젤롯당의 활동에 대해서도 함구합니다. 이런 유대민족의 현실 앞에 복음서의 예수는 일반적인 유대인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아마 로마와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대의 독립도 지지하지 않는 경계인, 혹은 뜻 모를 비유와 산상수훈을 낮게 읊조리며 민중을 선동하는 견유철학자이자 선지자, 혹은 세상을 모르는 낙관주의자였일지 모릅니다. 성전을 보며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한 예언이 성취가 동족의 반이 도륙당하는 현실이 될 줄을 예수는 과연 알았을까 싶습니다.
로마를 대하는 복음서의 자세
저는 성서에 등장하는 로마를 조금 객관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특히 복음서는 로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로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탄의 하수인으로 아니면 악의축으로? 바벨론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잠시 사용한 고육지책이었을까요?
로마를 대하는 성경의 태도는 매우 이중적입니다. 한 축은 로마의 멸망이 세상의 종말로, 예수의 재림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정도로 단호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유대 땅을 식민지배하고 있었던 로마를 바벨론에 빗대어 절대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1세기 독자라면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을 사탄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에게 우상숭배와 음행을 강요하는 음녀, 즉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기술함으로써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는 종식되어야 할 ‘바벨론의 포로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는 짐승의 수 666을 언급하며 악의 화신으로 로마황제를 빗댈 정도이니 유대인들에게 로마란 사탄의 왕국과도 같은 존재였음이 분명합니다. 구약의 절대악이 루시퍼로 상징되는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었다면 신약의 절대악은 로마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같은 황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태도는 로마에 우호적인 모습입니다. 복음서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칩니다.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성 밖으로 끌고 가 스데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돌을 던져 죽이면 그뿐이었는데 말입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죗값을 로마가 아닌 유대민족 스스로 평생 짊어지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보다 로마의 편에 선 것입니다. 사실 예수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누가복음에서 빌라도가 한 말입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살리려 했습니다. 로마에 대한 우호적인 모습을 성경에서 더 찾아볼까요?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고 숨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바로 로마인 백부장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방문하면서 이방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정말 죽일 놈은 로마인이 아니라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유대인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복음서가 말하고 싶었던 의도입니다. 이방선교의 걸림돌은 로마인도 아니고 헬라인도 아니고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바울의 서신서가 증언합니다. 초대교회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던 예수마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게 하였느냐?” (마3:7)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서에서는 유대인 인구 절반이 사라지고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이 도륙당하게 된 처참한 현실은 없습니다. 복음서의 그 어디에도 유대 전쟁의 전운이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예수와 같이 못 박힌 강도가 사실 그냥 생계형 강도가 아니라 유대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반역했던 독립투사였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생계형 범죄자를 남들이 다 보도록 십자가에 못 박을 수고를 로마인들은 결코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십자가형은 요즘 말로 하면 일제가 독립투사의 시신을 사대문에 매달아 놓는 것과 다들 바 없는 행위였습니다. ‘너희도 반역하면 이렇게 된다’ 뭐 이런 분위기입니다. 로마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1세기 팔레스타인의 최대 화두는 인류의 죄를 위해 대속하러 온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 로마에 맞서 성전을 수호하는 독립투쟁이었습니다. 성경만 보면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로마와 이스라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건 큰 선입견입니다. 당시 로마는 영국까지 영토를 넓혔고 인구도 1억에 가까운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복음서 예수의 이야기는 어쩌면 모두가 주목하는 주류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세푸스도 그렇게 예수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고 아마도 예수의 사역도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어떤 나라인가?
다시 저는 로마에 대해 조금 객관적으로 접근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유대인의 관점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흐름에서요.
로마로 말하면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로마문 명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 정책으로 고대 그리스는 물론, 오리엔트 지방, 셈족, 서유럽 켈트족과 게르만족을 포함하는 그야말로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의 집합체였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로마의 우산 아래에서 피정복민족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미국이란 나라와 많이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를 발전시킨 것은 관용과 포용 정책이었습니다. 로마가 유대땅을 식민통치한 방식을 보면 민족말살이 아니라 자치권을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까지 허락했으니 나름 제국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봐야 옳습니다. 로마문명이 법, 군사,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 등의 방면에서 인류문명에 기여한 공로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가 살았던 기원 전후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태평성대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카이사르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가 되고부터 기원후 180년까지, 약 200여 년의 평화 시대를 말합니다. 특히 네로바 황제에서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5현제 시대는 마키아벨리, 에드워드 기번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로마사 연구자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로마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인류 문명사적 가치에서 보면 아무도 로마를 악의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피정복민인 유대인에게는 지옥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천국이었던 겁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로마가 악의 축이 분명했습니다. 로마황제가 자신을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세상을 통치하는 운명이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피지배자들에 복종을 강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유대인들은 세금도 내고 통치규범을 따랐지만 로마황제를 신의 대리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더욱이 신을 모독하는 로마 황제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로마에 대해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식민통치를 당한 유대인에게 너무 지나친 감정이입을 하여 약자의 편을 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더군다나 예수가 유대인이었으니 확실히 로마는 민족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 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번영
그런데 이상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이런 로마를 살려두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로마가 망하고 예수가 영광중에 재림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응당 망해야 하는 로마제국은 5세기 서로마가 망하고 동로마가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망하는 15세기까지 무려 약 1400여 년을 더 존속합니다. 신성로마제국까지 친다면 그 역사가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당장 망해야 할 로마가 1000년을 넘게 지속한 겁니다. 누군가가 이를 두고 ‘주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다’라고 하지 않았냐?라고 말하면 참 어불성설입니다. 요한은 물론 초대교회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입니다. 당시 인류문명사의 주류는 누가 보더라도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로마의 역사는 도시국가부터 따지면 아무리 줄여도 거의 2000년이나 됩니다. 이런 로마를 악의 축이라고 봐야 할까요? 악의 축 치고는 인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중국의 최고전성기인 한나라도 500년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오늘날 미국 시민권과 동등한 위력이 있어서 제국의 시민이라는 것 자체가 큰 기득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생존 당시 대부분의 이민족들은 모두 로마의 정식 시민이 되는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체제를 보면 귀족과 평민계급이 대립하고 타협하면서 왕정에서 벗어나 공화정으로 500년 이상을 지속하였습니다. 늘 왕정만 꿈꾸었던 유대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로부터 공화정의 정치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여 시민계급을 중시하는 자신들의 정치이념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만 상고하더라도 로마는 결코 당시 성전 중심의 유일신만 고집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일관하던 유대정도가 맞설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로마제국의 대반전
로마제국의 대반전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만들어 버린 사실입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부활과 승리를 상징하는 제국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이런 게 다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라고 지금에서야 고개를 끄덕이지만 당시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겠습니까?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가 갑자기 예수를 믿고 회개하며 천국의 백성이 되어 나는 죄가 없다고,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꼴입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사실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의 숭배자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유익이 컸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정치는 통합되었고 황제는 자연스럽게 신적인 위치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성베드로성당을 건축했고 안식일을 태양신의 날인 일요일로 대체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세속의 권력이 되자 이때부터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악의 축이었던 로마는 그렇게 선의 축이 되었습니다. 지상의 제국을 영원한 제국으로 계승하려는 로마인들의 이 무시무시한 계획에 누가 동의할 수 있었을까요? 위대한 변신도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로마가 없으면 오늘날의 기독교도 없으니 조금 견강부회해서 말하면 오늘날 로마제국은 하나님이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유대인을 몰살시키면서까지 주님의 도구로 쓰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해묵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절대악은 있는가? 하나님에 의한 정의로운 폭력은 정당한가? 악을 이용해서 선함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면 이에 동의할 수 있는가? 다만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신비한 섭리를 세상이 모르는 것뿐이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그저 순종해야 한다면 인류의 그 많은 무고하고 억울한 희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 나아가 바벨론이나 로마를 사용해서 세상의 구원을 계획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점을 당한 것 또한 해방 후 기독교가 미군정을 힘입어 이 땅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도록 한 것이니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예수라면 그런 기독교의 탄생을 자신이 창세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라고 기뻐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복음서와 세계사를 번갈아 읽으면 생기는 매우 자연스러운 의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종교가 너희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고 수제자 베드로는 죽어 제국교회의 수장으로 영원토록 추앙받을 거라는 걸 예언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옷을 찢으며 분기탱천하진 않았을까요?
후세의 역사가들은 로마제국이 공화정에서 전제정으로 넘어가고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정복전쟁, 지도층의 분열, 경제쇠퇴, 기독교만을 인정하면서 생긴 타 종교의 탄압 등으로 분열되고 각 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결국 멸망했다고 봅니다. 영원한 제국이었지만 내부모순이 극에 이르게 되자 영원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가 남긴 유산의 긍정성은 에드워드 기번의 말처럼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인종이 다른 상대를 포용하여 자신에게 동화시켜 버린 그들의 개방성이 바로 로마가 후세에 남긴 진정한 유산이다. 그리고 로마가 융성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로마는 왜 멸망했냐고 묻기보다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유대인들이 바랐던 이스라엘의 회복은 다윗의 영화를 넘어 로마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것이었을 겁니다. 로마를 악의 화신이라고 나무랄 일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로마를 은근 주적으로 보는 견해를 따라 로마를 적대시하는 것은 아마도 로마를 대하는 편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로마를 부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처럼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은연중 로마황제를 닮아 있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에서 왜 메시아나 나와야 할까요? 다윗이 유대인에게는 로마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나라가 네 마음속에 있다는 매우 관념적인 주장을 했으니 식민지 유대 백성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썩어 없어질 제국주의가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마음에 새겨야 할 복음의 의미를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건 예수의 재림과 심판이 오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오늘날 신학자들이 예수의 말을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세계사의 렌즈로 로마를 보면 성경의 복음서가 바라보는 로마의 모습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의 좁은 시각에서 복음서을 빛낼 목적으로 이용했을 의도가 다분합니다. 복음서의 기자는 “유대인들이 못 알아보는 예수를 로마인이 메시아로 알아볼 정도였으니 당시 유대인은 얼마나 무지몽매했는가!”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세계사적인 정체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찬찬히 복음서를 넘겨보면 예수의 모습도 복음서마다 동일인이 맞는 것일까 다르게 보이고 세상에 곧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의 한계 또한 여실히 보입니다. 성경을 문자주의로 읽는 것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1281년, 일연에 의해 정식으로 출간된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나오는 단군의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설화나 신화로 믿습니다. 하물며 그보다 1200년 전 기록된 필사본에 의지해 저자조차 논란이 많은 복음서를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너무나 어불성설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성경이 진리라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이름의 편견
여러분이 만약 주 후 1세기에 살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였을까요? 예수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제자들처럼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랐을까요? 아니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젤롯당원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종교적 엄숙주의에 빠진 바리새인이 되었을까요? 절대 망할 것 같지 않은 태양의 제국 로마의 신민이 되었을까요?
예수와 제자들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은 매우 좁습니다. 예수는 평생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살지 못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진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의심과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안경을 벗어야 성경이 제대로 보인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삽니다. 신념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온 자신을 부정하기 힘드니까요. 인류의 역사를 보면 진리에 대한 확신과 집착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다. 그 속에 자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편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편견’을 뜻하는 영어 단어 ‘prejudice’는 라틴어로 보면 ‘먼저 이루어진 판단’이란 뜻입니다. 이는 ‘선판단’이나 ‘선입견’과 같은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편견은 명확한 사고를 가로막는 훼방꾼이 아니라 명료한 사고를 위한 본질적인 요소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라는 말만큼 세상에서 덧없는 이름이 없습니다. 가장 쓰기를 경계해야 할 말이 어쩌면 ‘진리’입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일부를 인용하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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