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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읽는 성서

예수님의 눈물

by 하늘밑 2024. 10. 21.

예수님도 우리처럼 우셨을까요?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세 번 정도 나오는데 첫 번빼는 죽은 나사로를 만나러 갔던 베다니에서, 두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마지막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눈물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나오는 곳은 아무래도 요한복음 11장, 베다니에서의 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의 일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 나타난 예수님께 서운함을 털어놓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2~34)

 
조문을 하러 왔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요11:36)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이 구절 때문인지 예수님이 이때 흘리셨을 눈물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여 격한 감정에 흘린 것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라는 설교의 단골소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우시는 예수님은 누가 생각해도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린 것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심령이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좀 매정하게 이야기하면 나사로를 평소에 너무 사랑했거나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검색해 보니 ‘통분(痛忿)’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엠브리마오마이’(embrimaomai)로 사랑의 감정보다는 분노와 경고, 책망, 불쾌한 감정에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썼다면 예수님은 아마도 당시 감정에 북받쳐 신음하듯 내적인 동요를 자제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민망(憫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타라소(taravssw)는 놀람이나 소동 등 감정이 격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둘러싼 조문객들을 보고 마음이 매우 불편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사람들이 수군거림에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고”(요11:38) 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우셨던 걸까? 아쉽게도 성경에는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셨다는 내용의 바로 위 구절,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말에 힌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베다니에서 25km 떨어진 요단강 동편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확증할 때를 기다려 베다니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베다니에는 부활과 생명을 앞에 두고도 죽음의 절벽에 멈추어 울고 있는 사람들, 생명수와 생명의 떡을 앞에 두고도 목말라하고 먹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 모두는 죽음에 갇혀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슬퍼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아둔함 앞에서 안타까움과 연민이 ‘통분(痛忿)’으로 바뀌고, 다시 ‘민망(憫惘)’함으로 바뀌며 눈물을 흘리신 것은 아닐까요?
 

The Raising of Lazarus / oil on canvas (50×65cm) / 1890, Van Gogh Museum, Amsterdam

 
* 반 고흐는 부활하는 나사로의 얼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그는 어떤 부활을 꿈꾸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