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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읽는 성서

예수가 북쪽으로 간 까닭은? (feat. 수로보니게 여인)

by 하늘밑 2024. 10. 22.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가복음(7:24-30)

 

들어가며

 
누가복음을 제외하고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예수 부활의 최초 목격자는 ‘여성’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었고 장사되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하는 복음의 핵심 케리그마를 지켜본 사람들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남성 제자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구약에서는 사실 여성들의 역할과 지위를 미약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만 못해서가 아니라 유대사회 전통에서 남녀차별이 깊숙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유대 랍비의 기도문에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입니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기억하실 겁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애굽기 20:17)

 
여자 혹은 아내를 남편이나 남자의 소유재산과 더불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중동근방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여인들에 대한 견해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적어도 성경에서는 그렇습니다. 실제 ‘여인’이라는 단어를 마가는 8회, 마태는 14회, 누가는 24회, 요한은 21회를 사용했습니다. 복음서의 핵심은 여성과 같은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복음은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와 사회적 질서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었고 불평등한 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사회에서도 복음이 복음 될 수 있는, 교회가 존립해야 하는 사회적 가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외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비천해 보이는 그들을 귀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이루는 사회였습니다. 여인은 소외계층을 대표하였고 복음서는 여인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활동 중 이적행위에 관해 가장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엮었던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 제자들에 관한 묘사가 매우 부정적입니다. 마가가 여성숭배론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마가 공동체 안에서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었고 실제로 교회 안에서 점차로 여성들이 실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동체의 주류가 여성이었으며 성경의 주된 독자도 소외층을 대변하는 여성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특별히 여성이야기를 어디서 예화로 특별히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현안을, 혹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여성들을 향한 예수의 태도와 행동은 당시 유대교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여성들을 치유했고, 그들이 자신을 만지고 따르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는 여성들과 귀천을 떠나 아무런 제약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 안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고통받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는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행위를 매개로 상식을 파괴하는 발언을 많이 하셨고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철저하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억울함을 토록 하도록 하였고 제자로서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풍토로 보아 예수가 여성과 자주 연관이 된다는 사실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승과정에서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가 축소되었을 가능성을 전제한다면, 내용이 짧은 마가복음 속에 여성의 출현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마가가 의도성을 갖고 큰 비중을 차지하도록 기록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몇 가지 경우에서는 예수와 남성 간의 관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수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힘없는 여성이 칭찬받기도 하며(12:41-44), 유대와 이방인 사이의 경계를 부수는(7:24-30)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여인들의 이야기
 
오늘 제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중요한 여인들을 짧게 둘러보고 오늘 들려주고 싶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① 열병에서 고침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막1:29~31)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시작합니다. 복음 치유사건의 첫 시작은 베드로의 장모의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왜 마가는 제자 넷을 부른 사건 직후에 베드로 장모의 치유사건을 복음의 첫머리에 기록했을까요? 이 사건의 제시는 열병의 치료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안식일날 회당이 아니라 가정집에 들어간 예수, 여인의 손을 잡은 예수,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된 후에 일상적 삶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수종을 듭니다. 장모의 모습은 회당의 이적에 사로잡힌 군중과 제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② 야이로의 딸과 혈우병 여인(막5:21~43)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어린 딸을 ‘달리다굼’ 하며 죽음 가운데서 일으킨 이야기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던 중 혈우병 걸린 여인이 군중을 뚫고 예수의 뒤로 접근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후 나음을 받은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유대 정결법의 규율을 어깁니다 혈우병 든 여인은 불결하다는 금기를 깨뜨리고 사회체제에 도전합니다. 특히 이 여인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세히 밝힙니다. 여기서 묻게 됩니다.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 예수를 불결한 여인에게서 지키는 자인가? 아니면 수치를 딛고 문화적 장벽을 허무는 자인가? 혈우병 걸린 여인의 담대한 이야기는 죽은 딸 때문에 근심하는 야이로와는 많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가 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는 아들을 선호는 유대사회에서 어린 딸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혈우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습니다. 예수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였으니 건강해라” 예수는 그녀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언급하며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했습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③ 헤로디아, 세례요한의 죽음(막6:14~29)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파스의 아내이자, 헤롯의 형제인 빌립의 아내입니다.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가 형제의 아내를 취한 일로 감옥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헤로디아의 딸은 모든 것을 다해 주겠다는 헤롯의 약속에 세례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헤로디아는 매우 사악한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마가는 왜 헤로디아 이야기를 복음서에 넣었을까요? 그리스 희곡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서사적이고 극적인 이야기는 복음서의 핵심에서 비켜간 듯 보입니다. 영화로는 번외편이라고나 할까요?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너무나 강력해 드라마를 보듯 빠져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누구나 듣고 싶어 하는 유명한 이야기였을 겁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약한 것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④ 렙돈을 바친 과부(막12:41~44)
렙돈을 바친 과부의 이야기는 서기관들에 대한 책망에 이어서 소개되어 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에 대한 교훈의 일환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구호의 대상이 되어야 할 여인이 있는 것을 탈탈 털어 바치게 하는 당시 서기관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설교해석이 요즘은 우세한 듯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많은 것을 바친 부자보다 적지만 참되게 헌금한 과부가 칭찬이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여인의 믿음은 남자들과 대조를 이루며 일반적인 여성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⑤ 향유를 바른 여인(막14:3~9)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바른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를 죽일 반역 모의에 사이에 액자구성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의 앞뒤 문맥은 다른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받는 수난을 전혀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배반하거나 부인함으로써 결국 예수 고난의 현장에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9:10, 32, 14:10-52, 66-72). 특히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칭찬받은 여성과 대조하여,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꾸짖는 이야기를 배열합니다(8:31-33). 마가는 희생과 해방이라는 유월절의 주제와 연결시켜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과 결부시킵니다. 체포모의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대단원의 막(14:1-15:39)의 서두에서 예수와 열두 제자가 유월절 식사를 하는 중에 포함된 이 이야기는 후에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붙잡힌다는 사실에 주목해 본다면, 그 여성은 죽임 당할 예수가 바로 종말의 메시아임을 알리는 예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가는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이 여성이야말로 예수가 종말의 메시아로서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여성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⑥ 부활의 목격자가 된 세 여인(막15:40~41)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세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였습니다. 다른 남자 제자들은 이미 ‘모두’ 달아난 반면에 세 여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의 매장, 예수 부활의 장면에서 중요한 목격자로 등장합니다. 이들의 행동은 세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41절) 따르며~섬기던~올라온~.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그들이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이제 제 이야기의 본론인 마가복음 7장,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로 가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5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마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설교는 대부분 끈질긴 인내심을 가진 여성으로서 온갖 수모를 겪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딸을 위해서 엎드려 간구함으로 마침내 허락을 받는 인내심이 있는 믿음의 여성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 끈질긴 믿음은 안 되면 될 때까지 매달리는 우리 문화의 기복적인 문화와 참 잘 어울렸습니다. 지금도 유튜브를 찾아보면 수많은 설교가 있습니다. 예수가 이방여인을 개에 비유하며 매우 모욕적인 말을 던진 것은 예수가 여인을 시험한 테스트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본문을 당시 마가의 입장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왜 마가는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성경에 넣었어야 했을까요?
 

두로와 시돈은 북쪽 레바논 지역으로 게넷사렛에서는 64km 정도 떨여져 있다.

 
본문을 보니 예수는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현재 레바논에 속하는 지중해 해변도시로 고대부터 해상무역으로 매우 잘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두로 위에 시돈이라는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백향목이나 자주색 염료 같은 고급 무역품들이 구약시대에도 이곳을 통해 유다지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수리아와 로마의 속국으로 억압을 당하다가 십자군 시대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회교와 기독교가 불꽃 튀기며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 마당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가 갑자기 왜 그리로 가셨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정말 가셨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 가셨어야 했는지 그 비밀은 마가만이 알겠지요. 실제 갈릴리에서 북쪽에 위치한 두로까지는 약 64km 정도가 됩니다. 그냥 가셨다고 하기에는 먼 거리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적어도 추측하기에 예수의 초행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쉬러 가셨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마가복음 6장 55절에 보면 갈릴리 게네사렛 지역에서 수많은 인파가 예수가 어디 있다 소문만 들려도 환자를 침상째로 매어 들고 몰려들었으니까요. 두로는 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여행하셨던 가장 먼 지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의 머릿속에는 늘 유대 밖 이방지역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역 자체가 그렇습니다. 지중해의 헬리문화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길목입니다. 갈릴리를 촌에 비유하는 건 좀 잘못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갈릴리 옆에는 세포리스라는 번화한 헬리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일부 신학자들이 견유철학자로 보는 것은 헬라문화권에 예수가 어려서부터 노출되어 지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박식한 언변과 비유가 당시 헬라인들에게도 통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에게 두로는 낯선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성장기 때 여러 번 다녀갔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들어간 두로의 어느 한 집에 헬라파 이방여인이 찾아옵니다. 그녀는 수리아 지역 페니키아 족속,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이 이방여인은 자기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이 소리를 크게 지르며 내 딸을 살려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예수는 그 소리를 듣고도 들은 척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안달이 났습니다. 듣다못해 예수에게 ‘그를 보내소서’ 청합니다. 내쫓으라는 말이 아니라 “얼른 한 번 보시고 어떻게든 해결해서 돌려보네시죠”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7장 27절)

 
이 말씀은 예수의 구원역사에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이 참여해야 하므로 이방인들은 기다려야 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녀’는 유대인을,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킴이 문맥에서 잘 드러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부유하고 신분이 좋다 할지라도 그 여인은 이방 여인에 불과하다. 제자들이 들으면 당연하다고 손뼉 칠 내용입니다. 예수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죠. 예수는 이전에 이미 데가볼리 같은 이방지역에서 스스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예수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저는 좀 다른 생각인데 기독교가 사회윤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적어도 르네상스 종교개혁 이후였고 서양철학으로 보면 칸트 이후입니다. 예수를 매우 도덕적인 인물로 욕 한마디 안 하고 사는 군자의 모습으로 이해하는 건 매우 무리 있는 발상입니다. 성전정화 사건에도 보듯이 예수는 욕을 안 해서 그렇지 매우 찰지게 구사했을 인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한 표현은 예수가 지어낸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유대인들이 두루 사용하던 속담 같은 관용표현일 것입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예수가 욕을 해서가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7장 앞부분에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7장 앞부분은 정결논쟁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자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절)”라고 따집니다.
 
장로의 전통이란 레위기 22장에 나오는 규례를 말합니다. 사실 이 본문은 제사장들의 성물을 대하는 계명이었지만 제사장을 자처하는 평범한 유대인들의 가정에서 스스로를 거룩한 제사장이라 여기며 지키고자 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구분하려던 정결법은 이제 세월이 흘러 남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마친 후 무리들에게 비유로 가르칩니다. 비유는 무엇이 진정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에 관한 비유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15절) 부정한 손에 닿은 음식이 몸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이런 말을 한 예수가 전통을 완전히 무시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마가복음의 문체에서 ‘A가 아니라 B이다’라는 말은 ‘A일 뿐 아니라 B이다’란 뜻입니다.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람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만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비유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합니다. 그 더러움이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냄, 악독, 사기, 방탕, 이기심, 교만, 어리석음(22절~23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은 제사장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과는 다른 방식,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으로 사는 삶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은 자녀에, 이방인들은 개에 비유하는 말씀은, 부유한 헬라파 여인이 들었을 때 자신이 비록 아픈 딸자식 때문에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고쳐달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예수의 말을 들었다면 속으로는 분명 묘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나 예수의 화법은 7장 앞에서 사람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한 예수 자신의 표현을 뒤집는 행동이 아닙니까? 한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니 예수가 한 말이라고 믿기에는 부적절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당시 예수가 오랜 사역에 시달려 인간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도 온전한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기록에서처럼 못 들은 척하며 심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논쟁하는 이 이방여인은 예수에 비해 겸손하면서 당당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가 한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대로 이어받아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가복음 7장 28절)

 
여인은 유대인의 우선권을 인정하면서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는 “자녀가 먼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앞부분에 다른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마가는 마태와 다르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 하면서 ‘먼저’라는 말을 쓱 넣었던 것이죠. 먼저가 있으니 이방여인은 ‘나중’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가 다른 설교와는 다르게 주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인을 통해 마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분명 있다는 말입니다. 여인은 ‘먼저’라는 예수의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에게 항변합니다.
 
수로보니게여인은 외칩니다. 예수여 ‘먼저’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개들이 감히 자녀의 떡을 빼앗아 먹을 수는 없지만 상 아래로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함께’ 먹지 않습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사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연인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당신은 지금 메시아로서 유대적 사고에 갇혀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의 구세주입니까? 온 인류의 구세주입니까?”

 
 
유대인들은 떡을 먹으며 손을 매번 씻을 수 없게 되자 떡의 부스러기, 즉 고물(가루)로 손가락을 씻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떡 부스러기가 상 아래로 떨어지겠지요. 이 부스러기를 집에서 키우던 개들이 와서 핥아먹었습니다. 주인과 자녀가 함께 말입니다. 마가 공동체는 바울의 선교 이래로 헬라파 이방인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게 어느 정도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적자가 아니라 서자가 느끼는 그런 감정말입니다.
 
제 생각에 마가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항변을 레위기 19장을 떠올리며 썼을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만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19:9~10)

 
추수하고 남은 밭 모퉁이의 곡식과 이삭, 포도원의 남은 열매, 추수하고 떨어진 열매는 이방인의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추수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방여인을 ‘개’로 표현하는 예수의 대화를 들으며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래도 우선인가 보다, 적자인가 보다, 예수가 우리의 자존심은 세워주는가 보다 했겠지요. 유대인은 스스로가 개처럼 취급받는 이방인들과 더 나은 존재가 아님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적어도 이 본문에서 만큼은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의 제자보다 더 위대해 보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알고 있으니까요. 예수는 수로보니게 이방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복음 전파의 핵심을 말하려고 했었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 서 나갔느니라 하시매(마가복음 7장 29절)

 
이방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이방여인의 판정승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는 스스로 판정패를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마가는 왜 이방여인의 이야기를 정결논쟁의 뒤에 배치하였을까?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정결의식은 음식이나 할례 등에 있어서 늘 지키던 것은 아니니 솔직히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그냥 전통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정결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에 비해 수로보니게 여인의 응답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음식 먹기 전 손을 씻으라고 다투던 유대인에 비해 이방여인의 딸이 나음을 받는 과정은 민족적 경계를 초월하고 유대의 관습을 초월하고, 성별과 경제적 차별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7장 앞부분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입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인터넷 사이트( Gospel of Mark Workshop )를 검색하다가 다음과 같은 말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Jesus the man, Jesus the Israelite with all his own cultural hang-ups, shows us how to choose to give up your power, how to react when confronted with the power and biases you may have, and how God’s love is breaking down all the boundaries that power lets us make between ourselves and ‘others’. (자신의 모든 문화적 집착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인 예수는 우리에게 권력을 포기하는 방법, 권력과 편견에 직면했을 때 반응하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권력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만드는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보여준다.)

 
마가는 매우 똑똑한 성경기자입니다. 예수가 이방인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최초의 교회가 이방인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사실을 용납하기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의 종교가 되어서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지역이라는 배경은 마가가 이방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예수가 일어나 갑자기 게네사렛을 떠나 북쪽지방 두로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대부분 7장 24절 앞부분이나 25절 앞부분, ‘먼저’라는 말이 나오는 27절의 앞부분을 마가의 편집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동편 유대인의 땅에서 유대인들을 먹이고 서편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을 먹인 사건(6:35 이하, 8:1-10)을 살펴보자면 앞의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는 유대인의 숫자이며 뒤의 남은 부스러기 일곱 광주리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방인의 숫자라고 보는 성경학자의 견해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성경에 두 개의 먹이심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을 향한 전도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가가 의도적으로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가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유대의 율법주의에 대한 설명 이후에 배치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와 이방인들의 수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선교의 전환점이 마련된 샘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오늘날로 보면 성소수자 여성이 있습니다. 예수는 오히려 지친 사역으로 선교의 기로에서 두로로 피해 있다가 그에게 다가가 ‘주’라고 부르는 비유대인 수로보니게 여인에 의해서 메시아로서의 죽음에 대한 결심을 굳히며 이방 선교를 자극받는 남성으로 나타나 보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성품에 치명적인 단점으로 보이는 이 일화는 오히려 예수의 구원계획을 보여주며 이렇게 마가복음에서 빛나는 듯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 외에 수로보니게 여인만이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녀는 권능자 예수의 정체성을 알아봤고 예수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요청하여 마침내 예수를 설득하여 자신의 딸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듯이, 여성이라도 남성들과 함께 신의 은총과 구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 예수는 여인과의 논쟁을 끝내고 두로를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모두가 이방인들의 거주지역이었습니다. 여인과의 대화가 예수로 하여금 이방인 사역에 중점을 두게 하고, 유대 밖의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였다고 말하면, 예수의 선교적 지평이 한 여인에 의해 열렸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함께 떡을 떼어먹는 세상이 열린 겁니다.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장 28절)

 
여인의 반응은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자신의 어린 딸이 정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멋진 결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방인이라며 우리 같은 한국인들은 마가의 머릿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방인 밖 이방인들입니다. 우린 모두 떡 부스러기 신앙인들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주여 주여 외치는 자기 아니라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은 ‘먼저’가 아닌 ‘함께’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되새기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