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추돌사고를 냈다. 사고는 잠포록한 날씨, 집 근처 교차로 공사구간에서 일어났다. 급정거를 했지만 늦었다. 앞차는 오래된 연식의 아반떼였다. 앞차가 충격에 밀려가며 바로 그 앞차를 박았다. 최신형 벤츠 SUV였다. 아반떼 운전석에서 허름한 후드티를 입은 청년이 내렸다. 내 쪽을 힐끗 보더니 말없이 머리만 긁적였다. 다행히 적의는 없어 보였다. 차량 뒷자석에 어디서 인테리어 공사를 마쳤는지 실리콘건과 빈 카트리지가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벤츠 운전자도 내렸다. 50은 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하얀 깃에 체크무늬 골프옷을 입고 있었다. 은빛 골프화가 빛에 반짝였다. 여성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아이구 놀래라를 외치면서 자발없는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고 청년이고 별 호응이 없자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꺼내 여기저기 찍기 시작했다.
벤츠의 뒷범퍼는 멀쩡해 보였다. 내 차의 앞 범퍼는 번호판 가드가 밀려 모서리가 부서져 있었다. 아반떼만 앞뒤 범퍼가 종이 이르집어 놓은 듯 깨져 있었다. 범퍼는 이미 내 손가락을 밀어 넣어도 푹 들어갈 듯한 구멍이 한 두 개 뚫려 있었고 여기저기 도색이 벗겨진 상태였다. 노후차량이 분명했다.
차량정체로 인근 경찰서에서 달려왔다. 젊은 여경관이 이름과 연락처, 주민번호를 요구하며 음주측정을 했다. 하릴없이 모든 요구에 응했다. 차량을 갓길로 옮긴 지 얼마 후 보험회사 응급 출동 담장자가 도착했다. 내 블랙박스에서 메모리 칩을 꺼내 태블릿 PC에 넣고 한참을 돌려 보더니 앞차의 브레이크등이 켜져 있었다고 확인을 시켜주었다. 담당자는 고객님, 고객님을 반복하며 ‘나 무지 친절해요’ 라는 말투로 길게 설명했다. 내 귀에는 이렇게 짧게만 들렸다. “차량의 안전거리확보 불이행으로 인한 고객님의 급정거 과실이 분명합니다.”
앞차 모두 대물배상 보험처리를 하기로 했다. 아반떼는 어디선가 번개같이 나타난 레카차에 실려 사라졌다. 수리비용이 찻값보다 더 나올 것 같았다. 청년은 뭐가 조급한지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있었다. 차를 말끔하게 수리하고 사고를 핑계로 며칠 쉴 수도 있으니 청년에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벤츠의 중년 여성은 골프장이 아닌 병원으로 직행했고 벤츠의 뒷 범퍼는 교환하기로 했다고 보험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외제차 소유자는 범퍼에 실금만 생겨도 100% 교환을 한다고 했다. 자기 돈 들어갈 일 없으니 나무랄 일도 아니다. 해외부품 조달로 시간이 더 걸려 동급차량 렌트비용까지 제공하면 최소 500만원은 나올 예정이라고 했다. 벤츠는 역시 벤츠였다. 접촉사고 치고는 제대로 한탕 했다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고직후 감정이 시틋할 법도 한데 화가 나지 않았다. 나를 비우려는 자기방어적인 지혜를 가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언제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고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한눈을 팔거나 해찰한 것도 없었다. 차는 가고 있었고 차창에 햇볕이 가득했었다. 해나른한 느낌 중에 충돌 경고음이 울렸다. 차를 멈추려고 했던 순간 자체 음소거 된듯 정신이 어찔하며 머리가 어리빙빙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아마도 봄신령이 지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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