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가 된 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수학학원에 보낸 일이 없다. 줄곧 나와 공부를 했다. 중1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 왔는데 문제는 중2에 올라오면서 붉어졌다. 수학은 둘째치고 딸아이의 사춘기가 겹치면서 대화자체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빠? 수학만 힘든 게 아니야 나는. 사는 것도 힘들어, 아빠까지 왜 그러는데!”
딸아이의 항변은 막장드라마의 단골대사처럼 뼈를 긁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부모의 말도 가식적이고 혐오스럽게 들린다는 중2가 아닌가? ‘즉문즉답’의 촌철어휘를 즐겨 사용하는 내 교육방식에 아이가 드디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딸아이가 무슨 쿵푸팬더도 아니고 굶기거나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수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료는 일찌감치 의사에게 맡겨야 했다. 급기야 딸아이와 타협을 시도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린 수학공부만 아니면 서로 행복할거야. 수학 공부는 학원에 맡기도록 하자”
입술과 눈썹이 동시에 떨리며 이게 무슨 복수정답이야 의아해 하는 딸의 지르퉁한 시선이 대답을 대신했다. 진료자체를 거부하는 환자에게 병원이나 의사가 바뀐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는 그래도 부모가 딸을 위해 학원정도는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마침 집근처에 창의수학을 전문으로 새로 개업한 학원이 있어 아내와 함께 방문했다. 새로 리모델링한 건물은 주차장도 있고 시설도 훌륭했다. 1층의 밝은 화이트톤이 맘에 들었다. 카페를 겸한 넓은 열람실과 긴 소파, 간이주방, 한 쪽 구석에는 원장의 하얀책상이 조명에 반짝였다. 2층은 자율학습실, 3층은 컴퓨터칠판이 완비된 강의실, 투명 엘리베이터에 에어콘도 시원했다. 곧 원장과의 상담이 이어졌다. 꽂아 놓은 명함에 CEO 아무개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왜 왔는지 묻기에 앞서 자신이 왜 이런 수학학원을 개원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했다. 원장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나오는 교육전문가 같이 플립러닝, 매쓰리터러시, 피어티칭 등의 학습시스템을 노트북 프리젠테이션을 하며 설명했다. 웅승깊은 언변에 심상치 않은 결기가 느껴졌다. 딸아이가 수학을 공부하는 데 저런 걸 다 알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무렵 원장은 구글과 R코딩, 빅데이터 등 TED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로 산중턱을 넘더니 칠부능선에 이르자 모든 게 인문학과 관련있다며 깊이 있는 예화의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원장의 책상위에 펜슬이 딸린 7세대 아이패드가 눈에 들어오면서 스티브잡스가 원장의 얼굴과 겹쳐서 나타났다.
“부모님도 아시지만 요즘 아이들은 문제를 보면 문제를 읽지 않고 바로 풀기부터 해요. 공식을 바로 적용하죠. 사각형의 넓이는 가로에 세로를 곱하고, 삼각형의 넓이는 밑변에 높이를 곱하고 둘로 나누죠. 제가 한 아이에게 물어봤어요. 왜 사각형은 ‘가로’와 ‘세로’라는 말을 쓰는데, 삼각형은 ‘밑변’이란 말을 쓰는 지 생각해 본적 있니? 아이가 대답을 못하더라구요. 제가 말했죠? 사각형은 이러 저리 돌려도 되지만 삼각형은 그럴 수가 없어. 거꾸로 세우기가 힘들지. 그래서 ‘밑변’이란 말이 필요한 거란다.”
고지능선에 도착한 원장의 흡족한 미소에 후광이 빛났다. 참견할 계제가 없어 한참을 듣고 있던 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저도 원장님처럼 그런 비슷한 질문을 제 아들에게 하곤 해서 잘 압니다. 아들은 그런 질문을 하면 자주 짜증을 내요. 사실 원장님이 한 그 질문은 아이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창의적인 거 아닌가요? 창의적 사고는 가르치려들면 잔소리와 다를 게 없어요. 저도 참 고민이 됩니다.”
원장은 내가 짜증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이 살짝 굳어졌다. 사위스러운 바람이 원장과 나 사이에 스쳐갔다. 무림의 세계에선 이쯤 되면 서로를 알아보고 자리를 떠야한다. 대충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원장이 나름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그런 말하면 원장 체면이 뭐가 되냐고 나무랐다. 내가 너무 그악하게 앙짜를 부렸나 싶긴 했지만 못할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감정이 말과 생각에 완벽하게 일치할 때 사람들은 ‘솔직하다’라고 한다. 솔직해지면 우선 자기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없어 보여도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니다’라고 말을 한다. 그것은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적당히 동조하는 것은 어찌 보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수 있다. 배려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솔직한 것은 스스로를 숨기지 않고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원장도 나도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나 나나 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원장이 이야기를 하도록 충분하게 배려했으니 대화 말미에 내가 한마디 했다 해서 원장이 그리 기분 나빠 할 일은 아니다. 무슨 데림추도 아니고 때로 좀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흠잡을 일이겠는가? 그나저나 우리 딸은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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