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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하루일기

2026 1월 22일 - 발가락을 깍아서라도

by 하늘밑 2026. 1. 22.

발가락을 깎아서라도
 
친구가 쓴 신문칼럼을 읽다 흥미로운 대화를 카톡으로 주고받았다.
 
친구는 얼마 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었다고 했다. 극 중 노숙자 고고와 디디가 나누는 대화에서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다. 오랜 노숙 탓에 발이 부은 고고가 구두를 힘겹게 벗으며 “발에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라고 말하자, 곁에 있던 디디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길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니. 그게 바로 인간이라고.”라고 말했다.
 
친구는 그 대화를 읽다가 세상 모든 일에 ‘남 탓’부터 하는 존재가 인간이고, 바로 그 지점이 부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좀 슬프게 들렸다. 제 발이 잘못됐는데 구두 탓만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군에 입대하고 신병교육대에 있을 때였다. 군화를 두 켤레 지급받았는데, 그중 한 짝이 발에 잘 안 맞았다. 발은 들어갔지만 엄지발가락이 계속 걸렸고 통증이 심했다. 교환을 요청하자 보급 담당 하사관이 발 치수를 다시 물었다. 280이라고 답하자 그는 군화 상단에 박힌 신발 치수를 기분 나쁘게 지적하며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군화는 신다 보면 늘어난다고 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군대는 발가락을 깎아서라도 군화에 맞추는 곳이야.”
 
위압적인 말투, 뒤에 늘어선 줄.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군화를 다시 살펴보니 앞볼 모양이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한쪽 볼이 분명히 작았다. 쉽게 말해 삐꾸였다.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가 사람을 침대에 뉘어 놓고 맞지 않으면 머리나 발목을 사정없이 잘라내듯 내 발가락을 제거할 수도 없는 일. 그 뒤로 한동안 고생했다. 군화가 좀 늘어나길 바라다가, 나중에는 내 발이 작아져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동기 하나가 옆 막사에서 군화 한 켤레를 몰래 공수해 오자는 솔깃한 제안을 했으나 알량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이 감동해서 군화가 늘어난 건지 내 발이 마침내 환경에 적응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군화를 우격다짐으로 거의 1년 가까이 신을 수 있었다. 인간승리였다. 군대에서 말하는 “하면 된다”는 구호를 마침내 몸소 실현해 낸 것이다.
 
친구는 세상 모든 일에 남 탓만 하는 인간이 부조리하다고 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문제 있는 군화에 결국 내 발을 맞춘 쾌거를 일궈낸 나 자신이 더 부조리해 보였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떳떳하지 못하게 체제에 순응해야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