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광스러운 하루
스마트폰 갤러리를 넘기다 오래전 찍어 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여러 해 전 강원도 원주, 박경리 문학의 집에서 찍은 벽면의 문구였다. 박경리 선생은 1980년 원주로 이사해 살며 대하소설 『토지』 4부와 5부를 집필했다. 기억에는 문학의 집 주변에 작가가 살던 옛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고 손수 가꾼 텃밭, 작은 연못, 산책로가 참 고즈넉하고 좋았었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우연히 마주친 문구.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감동이 있어 사진으로 남겼을 것이다. 문구 아래에는 출처가 뭐라 적혀있는데 글씨가 작아 보이지 않았다. 검색을 해보니 박경리 선생이 남긴 유고시 중에서 「산다는 것」의 마지막 연이었다.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여든을 앞둔 노작가는 병원을 다니고 혈압약을 먹는 일이 왜 그리 민망하고 부끄러웠을까? 나이가 들면 신진대사가 무너지고,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눈이 흐려지고 비틀거리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아프다고 약봉지를 들고 병원을 드나드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남보다 더 살았으면 아픈 것도 당연하다. 아프다는 생색이 자존심에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젊은 날의 청춘이다. 짧고 아름다웠던 청춘.
얼마 전 무릎이 아파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내 무릎이 좋지 않다고 했다. 왜 이렇게 아프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50년 넘게 썼는데 부러지지 않고, 아프더라도 아직 쓸 수 있으면 다행 아닙니까?” 그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박경리 선생처럼 아름다웠던 청춘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도 스스로를 젊다고 믿고 방만하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든이 되어야 찾아올 깨달음이 이렇게 쉽게 올 리 없다.
사진 속 문구를 다시 본다. 청춘에 대한 예찬보다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이라는 구절이 더 마음에 남는다. 아직 감당해야 할 눈물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쇠잔해지는 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진다. 속박과 가난이 없어서일까. 잔잔해진 눈이 밝아질 날은 언제일까. 철은 들려나. 오늘 하루가 생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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