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침의 미학
이규보(고려문신, 1168~1241)는 자신이 사는 곳을 ‘지지헌(止止軒)’이라고 불렀다. ‘지지(止止)’는 『주역(周易)』의 간괘(艮卦) 초일(初一)에서 “그칠 곳에 그치니 속이 밝아 허물이 없다(止于止 內明無咎)”라고 한 데서 따왔다. 그가 남긴 글 「지지헌기(止止軒記)」에 이렇게 적었다.
이른바 지지라는 것은 능히 그 그쳐야 할 것을 알아서 그치는 것이니 그쳐야 할 곳이 아닌데 그치게 되면 그 그침은 그칠 곳에 그친 것이 아니다.(夫所謂止止者, 能知其所止而止者也. 非其所止而止, 其止也非止止也.)
‘지지’라는 말에서 기어 다니던 아이가 바닥의 무언가를 입에 넣으려 할 때, 어른들이 다급히 외치던 말, “지지야, 지지.”가 떠오른다. 우리는 위험하고 더러운 것 앞에서 멈추라는 경고를, 가장 이른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사람의 불운은 대개 그치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행운은 늦더라도 멈추는 것에서 싹튼다고 믿는다.
‘지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십여 년 전, 그린벨트 해제로 분양을 앞둔 민영아파트 부지를 찾다가 마음을 사로잡는 곳을 발견했다. 한강과 가깝고, 고속도로 접근성이 좋았으며, 호수와 공원녹지가 예정돼 있었고, 곧 지하철까지 들어설 자리였다. 문제는 분양이 거의 끝났다는 점이었다.
아쉬움에 주변 부동산을 기웃거리던 중, 분양권을 구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이른바 유사 ‘떳다방’이었다. 분양권을 사들여 웃돈을 붙여 되파는 곳. 직접 찾아간 중개업소는 번듯했고, 사장은 떳다방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신뢰감을 주는 중년여성이었다. 그녀는 위험성은 알고 있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무엇보다 절차를 철저히 준비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파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아내와 나는, 홀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고 천만 원을 이체했다. 한동안은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내 집 마련의 꿈이 현실이 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개업소에서 전화가 왔다. 시행사의 명의변경이 끝날 때까지는 기존 명의자 이름으로 중도금을 입금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순간 불안이 몰려왔다. 잘못하면 돈을 날리고, 분양권 사기에 연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방식으로 집을 마련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양심의 질문이 따라붙었다. 무엇인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내와 상의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서 멈추자. 그럼 천만 원은? 아내는 없던 돈으로 치자고 했다. 그 돈은 양심을 팔 뻔한 대가이자, 인생 수업료라고 말이다. 찜찜한 마음으로 중개업소에 전화를 걸어 의사를 전했다. 그들은 별일 아닌 문제로 좋은 기회를 놓친다며 아쉬워했다. 다행히도 곧 다른 매수자가 나타났는지, 천만 원은 바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잃은 탕자를 얻은 아버지가 동네잔치를 열었던 것처럼 지인들을 불러 한끼 저녁식사를 맛있게 대접했다. 최고로 기쁜 날 중의 하나였다.
그때 우리가 그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무 일 없이 그 아파트에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마음이 떳떳하고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쳐야 할 때 그친다는 것은 늘 어렵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운 좋게도 잘 멈출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머뭇거렸다면 그치고 싶어도 그칠 수 없는 지점까지 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쳐야 할 때 잘 그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을 다시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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