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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하루일기

2026 1월 3일 - 나는 오늘 나쁜 사람이 되었다

by 하늘밑 2026. 1. 3.

나는 오늘 나쁜 사람이 되었다

 

새해 첫 주말, 아파트 사우나에 갔다. 이 사우나는 입주민 전 세대가 관리비로 운영비를 나눠 부담하는, 말하자면 아파트의 핵심 커뮤니티 시설이다. 지하 1층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에코백에 비누와 화장실에 걸어 두었던 수건을 대충 챙겨 넣고 슬리퍼를 신은 채, 익숙한 걸음으로 사우나로 향했다.

 

사우나는 제법 붐볐다. 간단히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 뒤 온탕에 몸을 담갔다. 수증기가 만들어 낸 희뿌연 안개가 조명을 타고 천장으로 퍼져 나갔다. 몸이 충분히 달아오르자 냉탕으로 옮겼다. 피부가 찬 기운에 따끔거렸지만, 이내 체온이 막을 치듯 몸을 감싸자 한기가 사라졌다. 물속에서 팔을 저을 때마다 다시 스며드는 냉기가 오히려 상쾌했다. 마지막으로 습식 한증막에 들어갔다. 10분 모래시계를 뒤집자마자, 구석 아래의 구멍에서 팅팅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공이 열리며 땀이 쏟아졌고, 혈액이 도는 느낌과 함께 몸이 나긋나긋해졌다. 이 맛에 사우나에 오는구나 싶었다.

 

기분 좋게 사우나를 마치고 나와 공용공간에 올려둔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탈의실에서 환복을 하려고 나무 탁자 위에 수건을 올려놓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수건이 내가 쓰던 것보다 도톰해 보였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남의 수건을 쓴 것이다. 후회해도 늦었다. 공용공간에 다시 가보니 내 수건이 구석으로 밀려 그대로 있었고 그 자리를 차지한 수건을 아무 의심 없이 내 것처럼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당황스러워 잠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 수건을 대신 놓고 갈까 싶었지만 그 사람이 그 수건을 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집에서 쓰던 것을 들고 나온 터라 눅눅하기까지 했다. 대신 쓰라며 놓고 가기에도 민망했다.

 

그때 문득, 지난번 사우나에서 내 수건이 사라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누군가 실수로 내 수건을 쓰고 가져갔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그저 재수 없다고 여겼을 뿐, 누구를 원망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공용공간에서는 소지품이 마구 섞이기 마련이라, 피해를 입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지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메모를 남기기도 어려운 상황, 나는 고민 끝에 이미 사용한 수건을 털어 원래처럼 개어 자리에 올려놓았다.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난번엔 나도 수건 없이 드라이기와 체온으로 몸을 말리고 나왔으니 샘샘 아니냐고, 적어도 나는 수건을 돌려놓기라도 했으니 양심은 있는 편이 아니냐고. 누가 들으면 한 대 맞아도 시원하지 않을 어쭙잖은 자기합리화였다. 나는 오늘 나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수건의 주인이 나보다 훨씬 다혈질이라면, 사우나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현장을 탈출하듯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오늘 이도 저도 못한 내 선택이 못내 후회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 죄책감이 마음에 남아 가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가벼웠다. 찝찝함과 함께 분명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쾌감이었다. 그것은 남을 속였다는 통쾌함도 아니고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아니었다. 그 쾌감은 답답한 규범에서 잠시 빠져나왔다는 자유에 가까웠다. 나는 오늘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남을 배려하며 예의있고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 사소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심문하듯 단속해 온 내 삶의 태도에서 잠시 이탈한 것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 잘못을 끝내 수습하지 않고 떠나왔다는 사실이 나에게 인간적인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재수없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날도 있어야 사람 사는 것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