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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사소한 독서

정보라, 『저주토끼』

by 하늘밑 2025. 12. 30.

정보라, 『저주토끼』
 
현실이라는 잔혹한 판타지
 
2022년 영국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뒤늦게 읽었다. 한국 호러 SF판타지의 대표작가라는 말이 틀림없었다. ‘한 편 정도만 읽고 그만두자’라고 생각했던 독서가 웬걸, 소설 속 단편소설 10편을 모두 읽어버리고 말았다. 장르적 특성이 명확한 각 단편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참신한 설정과 빠른 전개, 물흐르듯 써 내려가는 필력, 깔끔한 대화체 문장과 오싹하고 으스스한 쾌감이 마치 영드 「블랙미러」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호기심의 방」을 보는 듯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서 지속적으로 사회문제에 참여해온 정보라작가에게 현실은 분명 부조리로 가득찬, 잔혹한 호러 판타지기 분명했다. 

『저주토끼』 정보라 아작 2022


 
『저주토끼』에 수록된 10편의 단편소설 중 「저주토끼」, 「머리」, 「차가운 손가락」, 「덫」, 「즐거운 나의 집」이 호러이면서 판타지라면 「안녕, 내 사랑」은 호러에 SF라고 할 수 있고 「몸하다」, 「흉터」,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재회」 등은 동화적 설정에 젠더 이슈, 복수와 수용소의 상흔 등 다양한 요소가 뒤섞여 경계가 없다. 이는 정보라 작가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현실의 실존적 상태를 비틀어 보이고자 할 때는 동화 양식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잔혹성을 증언할 때는 사실주의적 소설 양식을, 현실 비판과 아울러 대안적 삶을 보여주고자 할 때는 판타지나 SF 양식을 자유롭게 활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몰입하게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이 서로 결은 좀 다를 수 있어도 모두가 일상의 공포와 억압, 불평과 불안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으며 현실은 얼마든지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일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10편 소설의 내용을 한줄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저주토끼 -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  머리 - 변기 속에서 머리가 하나 튀어 나왔다.
☆  차가운 손가락 - 어둠 속, 교통사고를 당한 차 속에서 누군가의 음성과 손가락이 느껴진다.
☆  몸하다 -  생리가 그치더니 임신이 되었다.
☆  안녕, 내 사랑 - AI인공지능 반려자와 사랑에 빠졌다.
☆  덫 - 덫에 걸린 여우의 발목에서 황금이 흘러나온다.
☆  흉터 - 동굴 속 쇠사슬에 묶인 소년에게 흉측한 괴물이 찾아온다.
☆  즐거운 나의 집 - 낡은 4층 건물을 사들인 부부에게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  저주에 걸려 앞을 보지 못하는 왕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
☆  재회 -  폴란드에 유학 온 나는 불편한 다리로 쉼없이 광장을 오가는 노인을 목격한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가족들은 저주 용품을 만드는 집안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술도가 유지의 아들과 친구였다. 친구는 정부의 식량정책에 맞추어 새로운 양조기술을 개발했지만, 경쟁사가 친구 회사의 술에 ‘공업용 알코올을 섞는다’는 악의적 비방을 해서 친구는 망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좋은 술 만들어 팔겠다는 건 죄가 아닌데, 힘 있는 사람들하고 연줄이 닿지도 않고, 그런 연줄을 만들어 줄 돈도 없고,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한 가정이 박살 난 거야.”
 
할아버지는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쟁사 사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저주토끼 전등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장난감 모양의 저주토끼를 경쟁사 사장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저주토끼는 경쟁사의 결재서류, 장부, 지폐, 나무 등 종이제품과 목제품을 가리지 않고 갉았고 사장의 손자에게 넘겨져 손자의 뇌를 갉아먹어 죽음으로 내몰았다. 저주토끼를 만진 사장의 아들은 전신 골절로 죽고 회사가 망하면서 경쟁사 사장도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저주토끼를 썼기 때문에 유령이 되어 영원히 기억을 잃은 채 ‘나’에게 매일 저주토끼를 통한 복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보드라운 분홍 입술과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토끼 전등이 ‘뇌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저주의 매개체로 등장하며 익숙한 물건에 대한 본능적 불안을 자극한다. 가장 안전한 동화 속 상징물인 토끼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인과응보적 복수를 한다는 쾌감은 잠시, 복수라는 ‘정당한 동기’가 무색하게 가해자인 할아버지와 피해자인 경쟁사의 가족 모두가 죽음이라는 자멸에 이르게 된다. ‘복수’는 결국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하는 저주이며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면서도 거부하지도 절제하지도 못하고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모습은 이 시대 끝없이 욕망을 자극하며 질주하는 자본주의적 속물근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공평한 정의란 원래 허울에 불과한 것이고 정당해 보이는 것조차 그 속을 살펴보면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공포스럽고 잔혹하다. 그러한 현실을 보고 있는 소설 속 ‘나’는 유령이 된 할아버지에게 끝없이 저주토끼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란 할아버지의 말은 자조섞인 한탄이라기보다는 자기모순적 현실을 극대화하는 말이다.
 
정보라 작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저주토끼」와 같은 짧은 단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뒤틀린 사회모순과 자본주의적 참상, 인간 내면의 지독한 본성과 근원적인 두려움을 잔혹한 공포의 형태로 그로테스크하게 제시하여 농밀한 긴장감과 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을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 정보라 <작가의 말>에서
 
'나의 가장 큰 위로는 타인의 불행이다'라고 말한 어느 소설이 생각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쓸쓸하고 외롭게 산다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이 개운하지 못한 불편함이 영 가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