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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사소한 독서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by 하늘밑 2025. 12. 15.
Françoise Sagan à Paris en juillet 1955 ©Getty - Bert Hardy - Picture Post - Hulton Archive

 
1.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39세의 이혼녀 폴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 오래된 연인 로제와는 권태를 느끼고 젊었을 때 자신이 증오했었던 욕심 많고 나이 많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고 다시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폴에게 25세의 시몽이라는 젊고 열정적인 청년이 나타나 데이트를 신청한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p.56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p.57
 
브람스는 자신보다 14살 연상이었던 클라라 슈만을 평생 동안 짝사랑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몽이 브람스라면 폴은 클라라 슈만이다. 브람스가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시몽의 데이트 신청은 매우 이례적이고 낭만적이고 도발적이다.
 
폴의 연인인 로제는 구속을 싫어해 폴과 오래된 연인임에도 그녀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또 다른 여자와 육체적인 사랑을 즐긴다. 폴은 로제를 사랑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집착인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시몽이라는 약동하는 젊음 앞에서 불안감, 호기심, 행복감에 흔들린다. 시몽의 폴에 대한 사랑은 열정과 헌신 자체였다. 시몽은 폴에 표현에 의하면 '행복한 몽유병자'였다. 
 
언젠가 자신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으로부터 미리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과거의 어리석은 사건들과 그 자신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갑작스러운 권태감과 나약함에 맞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섰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그 자신도 행복해지리라. p.104
 
폴은 시몽의 모습에 감동하고 시몽과의 사랑이 자신의 인생에 절대 찾아오지 못할 경험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나 폴에게는 양가적인 딜레마가 있었다. 자신이 점점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시몽을 점점 사랑하면서도 로제와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몽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폴, 그녀는 이전에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아름다운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는 시몽의 젊음을 부러워한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폴은 달라진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것 같지만 로제는 여전히 폴을 기다리게 할 뿐이고 폴은 시몽이 사라진 방에서 다시 외로움을 달래며 소설은 끝이 난다.
 
 
2. 사강 소설의 무상함
 
이 소설을 그저 일탈을 꿈꾸던 젊은 파리지앵이 쓴 단순하고 질펀한 연애소설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얼마나 다각적이고 절실한지 알 수 있다. 인물들은 단순히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며 고독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며 살아갈 보편적인 감정이 사강의 뛰어난 통찰력을 만나 다채롭게 빛난다. 파리라는 도심 속, 바쁜 일상 속에 느끼는 도시인들의 공허감과 나른함,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각각 다른 이유로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고 절망하다 또다시 만나고후회하며 외로움을 느낀다. 그 무료함의 스펙트럼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의  삶에 투영되어 다채롭게 다가온다. 아무리 유사한 상황이더라도 사람마다 고뇌하는 방식과 감정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이라는 난해한 감정앞에서라면 더 여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인생의 선택 앞에 모호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1959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참 솔직하고 모던하고 신선하다. 소설을 특별하게 하는 데는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 1945~2004)의 인생도 한몫 했다. 그녀는 한 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당대 ‘매력적인 작은 괴물’이었다.
 
2004년 9월 프랑스 북구 옹플뢰르의 한 병원에서 사강이 죽었을 때 《텔레그라프》는 다분히 중립적인 어조로, 《워싱턴포스트》는 다분히 비판적인 어조로, 그리고 영국의 언론은 사실에 입각해 그녀의 삶을 요약했다. 10대 후반부터 생미셸 대로의 카페와 클럽을 들락거렸고, 골루아즈 담배와 커피 한 잔이 아침 식사였으며, 위스키 잔을 줄곧 손에서 놓지 않았고, 문턱이 닳도록 카지노를 드나들며 인세 전액을 간단히 탕진했고, 재규어와 애시튼 마틴, 페라리, 마세라티를 바꿔 가며 속력을 즐기다가 차가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3일간 의식 불명 상태에 놓이기도 한, 낭비와 알코올과 연애와 섹스와 속도와 도박과 약물에 ‘중독’된 그녀의 삶이 그녀의 문학을 압도한 격이었다. p.153
 
이러한 삶을 살았던 프랑수아즈 사강이기에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얼마나 독서와 문학을 사랑하고, 뛰어난 글을 썼던 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보다는 말년에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되었을 당시 남긴 유명한 문장 ‘J’ai bien le droit de me détruire.’(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강의 인생은 그녀의 작품에 나오는 여러 주인공들이 파리 사교계에 속해있으면서도 늘 중심으로 들어가지도,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방랑과 쾌락이 주는 절대적 고독감 속에 남아 있었던 것과 닮아 있다.  주인공의 주변성은 아마도 사강이 추구한 문학의 핵심이고 자유일지 모르겠다.
 
Je crois que ce sont des marginaux. Mais bien sûr ils ne le savent pas. Être marginal implique qu’on ne sait pas qu’on l’est. Les gens qui se disent marginaux ne le sont pas vraiment. Mes marginaux à moi ont un certain sens de la gratuité, ce qui n’est plus de mise, d’ailleurs, de nos jours. Ils sont toujours en état de rupture... Ils sont des problèmes sentimentaux, des ennuis d’argent, la jeunesse les quitte...Tous les héros de roman sont en état de rupture quand commence le livre. C’est nécessaire. - Françoise Sagan, Répliques, Paris, Quai Voltaire
 
나는 그들이 주변부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들 자신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주변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주변인임을 모른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주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주변인이 아닙니다. 제 주변인들은 무상성, 대가를 바라지 않는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태도 자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단절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에 시달리고, 돈 걱정을 안고 있으며, 젊음이 그들을 떠나갑니다. 소설의 모든 주인공들은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미 단절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2016

 

1959년 9월 30일 파리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의 책 사인회 중인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 © Getty - Keystone-France/Gamma-Rap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