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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사소한 독서

김홍,『말뚝들』

by 하늘밑 2025. 12. 10.

김홍,『말/뚝/들』

 

말뚝들, 김홍, 한겨레출판 2025. 제30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

 

말뚝과 눈물

 
김홍, 이 거침없고 경쾌한 작가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야기는 은행과 대기업, 외국인 노동문제와 산업 재해, 카지노와 해외원정 도박, 계엄령 선포에 배철수와 백종원까지 등장시키며 정신없이 질주한다. 영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자동차 트렁크 납치극과 기업형 조폭의 등장은 공포와 긴장감 대신 웃음을 자아내고 갑자기 출몰하는 말뚝은 소설의 장르를 현실과 판타지 그 어중간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읽으려면 읽던가? 자신감이 넘친다. 이런 대담하고 기발한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소설 속 '말뚝'은 지울 수 없어서 시랍화된 상처를 의미한다. 말뚝은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가정집 거실로 진격하여 우뚝 서있다. 우리 사회가 은폐하고 잊고자 했던 무수한 슬픈 기억들은 말뚝에 표정으로 새겨져 한 가정과 개인의 엄연한 현실로 다가온다. 말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울고 만다. 말뚝들이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을 둘러싸고 모여들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우는 모습은 슬픔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세종대왕 동상의 받침대 위 네 방향에 말뚝들이 간격을 벌리고 서 있었다. 하나같이 등을 돌린 채였다. 볼 수 있는 건 말뚝들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장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강처럼 흘러 한자리에 모여든 이유는 울기 위해서였다. 우는 사람은 답답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는 게 정부에겐 비상사태였다. p.203
 
잠시 망설이던 수거자들이 하나둘 마스크를 벗었다. 서로 얼굴을 처음 보는지 낯설어하며 인사를 나눴다. 보디백에 담아 가져가려던 말뚝을 바라보다 하나둘 눈두덩이를 훔쳤다. 그래서 광장에 나온 사람 중에 울지 않은 이는 한 명도 없게 됐다. p.210
 
그런가 하면 가짜울음이 있다. 작가는 이것에 육두문자를 날리며 시니컬하게 비웃는다. 현실풍자는 덤이다.
 
“주여,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켜주소서!” 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섹스 피스톨즈도 지난 세기에 자신들의 여왕을 위해 비슷한 기도를 올리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이때에 저들의 하나님이 이 땅의 대통령을 지켜주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응당 그래야 마땅하지 생각하다가 씨발, 또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바로 옆사람은 가슴을 치며 거의 통곡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열성적으로 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합심해 가짜 울음을 울다니 믿기기 않았다. 장은 심하게 모욕당한 느낌을 받았다. 말뚝 앞에서 무너지듯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의 마음이 그곳에서 실시간으로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p.222
 
자기도 모르게 우는 사람들, 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 모든게 괴롭고 슬프고 필연적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느낌.  벗 잇츠 낫 유어 폴트!! 내가 잘못해서 생긴 슬픔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사회가 글러 먹어서 생긴 슬픔이다. 말뚝 하나마다 죽음이 하나다. 제련소에서 유독물질에 중독돼 죽은 외국인 노동자, 나흘째 잠을 못 자고 운전하다가 인도를 덮친 택배 노동자, 그 차에 받혀 숨진 아이...그러니 말뚝 앞에서 겸손해라. 우리 속에는 냉담과 무관심이 만든 마음의 빚이 있다. 서로에게 진 빚이다.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 말뚝이 자기가 만든 빛 속에서 하얗게 타올라 사라질 때까지. 
 
큰 빚이 큰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p.280
 
소설을 읽은 후 생활 속 부작용. 역전우동을 지나가다 문득 소설 주인공 ‘장’이 정신없이 취해버리고 싶다던 김치우동이 떠오른다. 역전우동에는 브레이크타임이 없다던데, 진짤까 확인하면서. 운이 좋으면 백종원과 배철수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다. 장을 납치했던 범인의 정체는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