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극히 사소한 독서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by 하늘밑 2025. 12. 17.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단정한 커트에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 말끔한 정장, 안경, 넥타이, 결혼반지, 오른쪽 손가락에는 늘 여송연을 끼고 있다. 토마스 만(Thomas Mann,1875-1955)의 빈틈없는 외모다. 그냥 봐서는 작가라기보다는 세무사나 공무원이 어울린다. 1929년, 54세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의 문학은 독일에서 교과서로 통한다. 줄거리와 서사는 문학과 철학, 그리스 신화를 통섭하며 지적인 완벽함을 추구한다. 단점이라면 좀 지루하고 어렵다는 것. 그리고 쉼표로 이어지는 긴 문장을 읽노라면 소설인지 문학평론인지, 에세이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토마스 만은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아 그리스 비극에 심취했다. 니체가 모든 가치를 전복하고 세상에 대항하는 디오니소스 적인 삶을 추구했다면 만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태생이 부유층 시민계급이었던 그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려 했다. 디오니소스적이 아닌 아폴론적인 문학을 고집했다. 좋게 말하면 문학의 순수성과 균형을 추구했던 샘이다. 좀 삐딱하게 말하면 도덕적이고 예술적인 것과 퇴폐적이고 자유로운 것의 어정쩡한 동거다. 만은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항상 양극단의 대치점을 정해두고 긴장과 변주를 즐겼다. 이런 경향은 그가 독일문화에 깊숙이 뿌리박은 가장 독일적인 작가이면서도 미국으로 망명했고, 전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분단된 독일의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고 스위스에 안식처를 정했던 삶의 태도와도 관련있다.  
 
그런 토마스 만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이 작품을 그의 동성애적 자전소설로 보는 평론가들이 많다. 그만큼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겉으로 보기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나이 오십이 넘은 유명 작가가 베네치아에 놀러 왔다가 십 대 미소년에게 반하고, 소년의 주위만 맴돌다가 콜레라에 걸려 죽는 이야기다. 토마스 만은 소설의 주인공인 쿠스타프 폰 아센바흐에게 자신이 일생 쌓아왔던 문학의 지향점을 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적으로 완벽한 아센바흐는 궁극의 아름다움이 몸으로 구현된 미소년, 타치오에게 끌린다. 원래 아센바흐가 추구하는 지적세계는 육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추상적이고 에로스적인 영역이다. 기독교 이신론의 입장이라면 다분히 플라톤적이다. 완벽한 형식은 저 너머의 이데아에 있을 뿐이지 결코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센바흐는 소설내내 소년 타치오를 바라보기만 한다. 다비드상을 관람하듯 시선으로만 사랑한다. 하나가 되고 싶었으면 말하고 만져보고 안아보고 싶었을 텐데 아센바흐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한다. 아센바흐는 지적이고 건강해 보이지만 속에는 근엄한 도덕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토마스 만이 이렇게까지 아센바흐에게 집착하면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쯤되면 참 궁금해진다.
 
아센바흐는 지적으로 고양된 상태로 주도면밀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잠을 자지 못했고 늘 피곤했다. 그러다 공동묘지 납골당에서 빨간 머리 피부에 깡마르고 잇몸이 드러난 괴상한 모습의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흡사 죽음의 사자를 닮아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탔던 곤돌라는 새까맣게 칠해진 관의 모양이었고 리도섬 호텔에서 마주친 타치오의 가슴에는 빨간 리본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는 콜레라 역병이 돌며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보면 죽음으로 질주하는 서사다. 죽음의 그림자는 도덕과 예술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종착점이기도 하다. 소설 끝에는 타치오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콜레라로 죽어가는 아센바흐가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다.
 
소년은 자욱하게 안개 낀 무한한 바다를 따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다가 다시 멈추어 서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니면 무슨 충동이 솟았는지, 한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상채를 돌렸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상체를 돌렸다. 소년은 어깨 너머로 물가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소년을 지켜보는 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으로 소년의 아련한 회색 눈이 경계를 넘어와 그의 눈과 마주쳤던 그때처럼. 그 전까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저기 바깥에서 걸어가는 소년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아센바흐의 머리가 이제 소년의 시선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살짝 들렸다. 그러더니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그 바람에 그는 밑에서 위로 눈을 치켜뜬 것처럼 보였고, 힘없는 내면으로 가라앉는 표정이 깊은 잠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기엔, 창백하고 사랑스러운 ‘영혼의 인도자’가 저 바깥에서 미소 지으며 손짓하는 것 같았고, 마치 그 인도자가 허리에서 손을 떼어 저 먼 곳을 가리키며 광대한 약속의 땅으로 먼저 둥둥 떠가는 듯했다. p.311
 
아센바흐는 멀리서 쓰러져 죽는다. 아센바흐가 쌓아올린 완벽한 세계는 신체적인 욕망이나 관능의 아름다움을 용납하지 못했다. 아센바흐는 그것을 어떻게든지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런 경계도 없는 바다를 배경으로 욕망하는 자신과 관능의 대상인 미소년의 세계가 합일한다. 소년은 그를 이끄는 '영혼의 인도자'였다. 예수가 그렇게 했듯 구원의 길에 죽음은 필연의 과정이다. 아센바흐는 그것을 따라 죽는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완성으로 보인다. 토마스 만은 아센바흐의 죽음을 통해 자기 속에 억눌려있던 예술의 완성과 동성애적 지향성을 문학이라는 숭고한 양식으로 해소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결국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도덕과 예술의 경계에서 어떻게 도덕적 순수성을 잃지 않고 열정과 욕정의 세계를 품을 것인가? 토마스 만은 자신의 정신적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바깥 세계에 탐닉하기보다 그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와 승화시키고 죽음으로 절대 해방을 맞이하고자 한다. 이런 행위가 사실 문학과 예술의 순기능인 것은 맞다. 누구나 카사노바처럼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너무나 도덕적인 삶에 대한 연민이라고나 할까. 소설에서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얼굴을 화장하고 입술을 붉게 칠해 젊게 보이려는 아센바흐의 속물적 욕망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런 모습이 꼭 아세바흐에게만 있을까? 나를 포함해 답답하고 고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샌님 행세를 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아센바흐의 아류다.  인생이 고상하고 말투에서 서사적 윤기가 좌르르 흘러내려도 품위과 경박함의 차이는 종이 한 장 보다 얇다. 예술로 포장하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한 자기합리화다. 자기모순적이고 지적인 사랑은 아름답게 보여도 늘 그 끝은 지리멸렬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누구나 마음속에 제어하지 못하는 열망 한 가지 쯤은 담고 산다. 때로는 일탈적이고 비도덕적이기까지하다. 아센바흐를 탓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토마스 만의 한참 선배였던 괴테는 일흔네 살에 울리케라는 열아홉 살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청혼까지 했다. 물론 주위에서 그러지 말라고 뜯어말려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괴테뿐인가? 베토벤도 그랬고 피카소도 그랬다. 토마스 만은 가정도 명예도 잃을 수 없었으니 절대 이런 시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토마스 만 사후 20년 뒤에 공개된 그의 일기로 그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졌다. 아마도 그는 한편생  진심을 숨기면서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을 예술로 포장하여 감추며 살았는지 모른다.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고전으로 새롭게 읽히는 이유다.

 

토마스 만 세계문학단편선 현대문학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