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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일탐

박지원(朴趾源) 「백이론(伯夷論)」

by 하늘밑 2025. 9. 10.

입장은 달라도 도(道)는 같다

 
나는 말한다. 탕임금과 백이와 무왕은 도가 같았다. 그들은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탕 임금이 걸(桀)을 추방하자 천하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자 탕임금은 진실로 염려하여 말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 걱정이다.”라고 했다. 무왕이 마침내 탕임금을 따라 그와 같은 일을 행하자 천하 사람들이 또 흡족해하며 이상하게 여기기 않았으니 후세를 위하여 염려됨이 진실로 커서였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의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다.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어서가 아니라 그의 의리를 드러내려 했을 따름이다. 그들이 후세와 천하를 염려한 것은 똑같았다. 아, 예의를 갖추어 봉양한다 해도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 부족하고, 표창한다 해도 그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 부족하며, 신하로 대하지 않는다 해도 그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고, 봉분을 만들어 준다 해도 백이를 후하게 대접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吾故曰湯伯夷武王同道。爲其爲天下後世慮也。湯放桀而天下逌然而莫之恠。則湯固已慮之曰。吾恐後世。以吾爲口實。武王乃踵而行之。天下又逌然而不恠。則其爲後世慮誠大矣。故伯夷之非武王。非非其擧也。明其義而已矣。武王之不封伯夷。非忘之也。顯其義而已矣。其慮後世天下同也。嗚呼。禮養之不足以明其義於後世也。表章之不足以明其義於後世也。不臣之不足以明其義於後世也。封之不足以厚伯夷也。박지원(朴趾源) 「백이론(伯夷論)」
 
※ 탕은 폭군인 걸(桀)을 죽였고 무왕은 폭군인 주(紂)를 정벌했다. 걸왕과 주왕은 중국의 2대 폭군으로 극악부도한 정치를 행했던 자들이다. 패역한 군주를 죽여 백성을 구했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신하 된 자가 군왕을 죽이는 것이 마땅한가?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했으니 군주가 패역을 행하면 바로잡도록 해야지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 유학의 원칙이었다. 백이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사람이었다. 주를 정벌하러 가려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부당함을 주장했으니 말이다. 탕임금과 무왕, 백이 사이에서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는가?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아무리 푸성귀인들 그 누구 땅에 났나니

 
사육신의 하나였던 성삼문의 시조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양산이 수양대군이라면 이제는 백이와 숙제를 말한다. 즉 무왕을 반대했던 백이와 숙제보다 더한 절의를 채미(고사리)조차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을 표현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백이는 동양사회에서 충과 효, 의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무왕이 바라던 세상과 백이가 바라던 세상이 다르지 않았을 것인데 무왕은 패역한 군주를 죽이려 하였고 백이는 패역한 군주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뜯어말렸다. 무왕과 백이는 서로 반대되는 정치적 행동을 한 것이다. 누가 옳은 것인가? 이것은 마치 병자호란 때 최명길과 김상헌의 관계, 고려말 이방원과 정몽주의 관계와 같다. 서로 대립되는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이런 대립이 꼭 과거의 일만인지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더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다. 
 
연암 박지원은 이 난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탕임금과 백이와 무왕은 도가 같았다. 그들은 모두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연암은 무왕과 백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이들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천하와 후세를 염려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파악하였다. 백이가 무왕의 행동을 비난한 것은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힘으로 신하가 군주를 쫓아내는 일이 원칙적으로 옳지 않은 일임을 밝히고 싶었다는 뜻이다. 무왕이 백이의 봉분조차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백이를 잊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백이의 행동을 역으로 드러내어 후대에 자신처럼 임금을 함부로 쫓아내는 일이 없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이의 마음이나 무왕이 마음이 같았다고 본 것이다.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학자들은 무왕을 높이고 아울러 백이도 추앙하였다. 백이의 행동은 원칙적인 상도(常道)였고 무왕은 행동은 상황에 따라 최선의 방도를 찾은 권도(權道)로 본 것이다. 연암의 이런 의식은 백이가 조선후기 북벌과 명나라의 의리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염두에 두면서도 반대로 북벌만이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 신문물을 배워야 하는 조선후기의 절박한 필요를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작용하였다. 백이도 옳고 무왕도 옳다고 한 것은 양측의 비판을 모두 받을까 두려워하여 이도저도 아닌 한 발 물러서기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며 면밀히 살피면 극단적인 혐오로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아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본 것이다.
 
죽어도 바꿀 수 없는 원칙이란 없다. 그런 원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전체주의와 다름아니다. 원칙을 보존하면서도 원칙이 허물어 버린 비상식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저울이 기울어지도록 한 추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작업이다. 원칙이 상도(常道)이고 무왕의 정벌이라면 그 원칙을 보조하는 것이 권도(權道)이고 백이와 같은 의인의 충언이다. 모든 사회적 이념이 저울의 균형점이 아니라 ‘극(極)’으로 치닫는 요즘 세태에 백이와 무왕의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상생과 동도(同道)의 관계로 풀어낸 연암의 안목이 그립다.
 

중국 송나라 산수화가 이당이 그린 ‘채미도’. 백이와 숙제의 죽음을 다뤘다. 베이징 고궁박물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