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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사소한 독서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A Short Philosophy of Birds)』

by 하늘밑 2025. 9. 3.

"비록 지극히 미미한 사물들, 이를테면 풀, 꽃, 새, 벌레와 같은 것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하늘이 부여한 자연의 현묘함을 엿볼 수 있다." 박종채 『과정록』
 

원서 첫 페이지의 삽화. 번역본에는 보이지 않아 아쉽다.

1. 텃밭과 물까치

시골에서 텃밭을 일구다 보니 지렁이, 땅강아지, 달팽이, 방아깨비, 여치, 사마귀, 박새, 곤줄박이 등 어릴 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다양한 생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최근 눈에 띈 것은 물까치라는 텃새입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까치는 푸르고 검은빛의 꼬리와 하얀 뱃가슴이 특징이라면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물까치는 날개는 청회색에 가깝고, 목에서 배꼽은 회백색, 쐐기 모양의 꼬리 끝은 흰색입니다. 까만 빵떡모자를 쓴 것 같은 머리 부분이 이채롭습니다. 덩치는 도시 까치에 비해 작지만 공격성이 있고 사람의 접근을 매우 싫어합니다. 도시까치가 ‘까악까악’하고 제법 큰 소리를 낸다면 물까치는 ‘째짹까악’하는 작고 예민한 소리를 냅니다. 도시 까치는 음식물 쓰레기가 있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덤벼드는 반면 물까치는 주로 도토리와 잣, 곤충을 먹는데 텃밭이 있는 곳이 마침 잣으로 유명하니 물까치가 눈에 잘 띄는 이유를 알만 합니다.
 
물까치가 도시까치와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라면 무리 지어 이동하는 특성입니다. 가끔 전신주를 보면 70여마리의 물까치가 드론이 비행하듯 무리 지어 날다가 일시에 전깃줄에 내려앉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물까치는 집단으로 먹이를 찾거나 둥지를 방어하고, 복잡한 울음소리로 소통하는 등 사회적 행동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 울타리에 물까치 한 쌍이 앉아 있을 때가 있는데 조금만 다가가려고 해도 긴 꼬리와 날개를 이용해 재빠르게 도망가 버립니다. 무리와 경계 신호를 주고받는지 푸드덕 날개 소리에 소리에 주변의 물가치들도 덩달아서 날아오르기 마련입니다.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A Short Philosophy of Birds)』 다른, 2019


 2.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새들은 어떻게 사랑을 할까? 동반자에게만 충실할까, 아니면 자유분방한 관계를 즐길까? 어째서 어떤 새들은 부지런한 여행자이며, 또 어떤 새들은 한 장소에 머무르기만을 고집하는 걸까? 부모로서의 책임을 되도록 오래 지는 게 나을까? 왜 멧비둘기는 암컷과 수컷이 양육을 분담하는데, 목도리도요는 암컷이 모든 양육을 떠맡을까? 새들은 어떻게 일상을 꾸려나가고 비와 바람, 어둠을 이겨낼까? 정말로 새들은 죽을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몸을 숨길까?” - 저자 서문에서
 
새의 생태와 인간의 내면을 오가며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주는『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A Short Philosophy of Birds)』은 코로나로 고생하던 2019년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프랑스 조류학자인 필리프J.뒤부아와 철학자 엘리르 루소는 평생 새를 관찰하며 새의 모습에서 우리의 삶을 일깨울 수 있는 비밀스러운 교훈을 이끌어냅니다. 저자들은 새를 아주 오래된 작은 철학자라고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새들은 오리, 멧비둘기, 굴뚝새, 뻐꾸기, 거위, 울새, 극락조, 카나리아, 종다리, 방울새, 펭귄 등 30여 종에 이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시는 새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새를 비롯한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교훈이며 진리라는 것들이 알고 보면 얼마나 그릇된 오류와 편향된 확신이었는지를. 인간은 늘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지만 최상의 포식자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의 흐름을 역행하고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인간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연속에서는 개미 한 마리, 새끼 새만큼이나 연악합니다. 새들이 자신의 삶을 묵묵하게 살아가며 자연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움과 가벼움, 솔직함, 겸허함만큼은 우리가 따라잡지 못할 듯 합니다. 부지불식 중 인간이 지닌 복잡한 지적 능력이 새에게 없다는 이유로 새를 폄하하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곧 알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야말로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능력을 지적 위계로 나누어 평생 배우면서 정작,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관용과 배려와 같은 기본 인성에 대해서는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책을 읽으며 장자(莊子)가 「지북유(知北遊)」에서 세상의 도리가 개미에, 땅강아지에, 가라지에. 기와 조각과 벽돌에, 똥과 오줌에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름 존재의 의미가 있으며 세상을 움직이는 도리를 자신의 유전자에 각인한 채 살고 있습니다. 하찮은 존재란 없습니다. 모두가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여하고 진리를 드러냅니다.  잠깐 공원벤치에 앉아 바람소리를 느끼고 새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일 몇 분의 여유도 없는 현대인들은 장자의 말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자는 그런 인간에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삶의 루틴 속에 좀더 자주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을 넣는다면 어떨까? 무감각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과 자연을 연결하고, 주변과 상호작용하기 위해서 시작, 후각, 청각을 예민하게  갈고닦는다면?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티티새와 제비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면? 올빼미의 신비로운 울음소리가 밤의 침묵을 깨고 지평선으로부터 커다란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그러면 우리의 삶에는 시가 넘쳐흐르기 시작할테고, 더 이상 회색빛 일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38
 
새도 행복을 느낄까요? 저자는 개똥지빠귀를 예로 들면서 행복의 기준을 논하는 인간사회의 잣대를 무너뜨립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새들은 그저 존재로서 행복할 뿐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일까요?
 
“새는 그렇게 살아 있다. 성실하게, 다급하게, 무언가를 찾고, 파헤치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하지만 그러고 나면 몇 시간이고 나무 아래에서 가만히 쉴 줄도 안다. 그저 매 순간에 존재할 뿐이다.” p.82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새에게는 즐거움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고뇌 같은 건 내던진 채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찾아간다. 새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삶의 지혜’가 있다면 바로 금욕이다. 자연스러운 욕망을 따르며 자신을 통제하지 않고, 욕구를 포기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다. 우리가 아는 진실은 하나다. 새는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새는 그저 행복을 경험할 뿐이다.”p.138
 
이 책에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강한 인상과 깨달음을 얻은 곳은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제비의 생태에서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 부분입니다.
 
“새들은 죽기 전에 몸을 숨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새가 자동차나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경우를 빼고 어딘가에 죽어 있는 걸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새의 사체를 발견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프거나 쇠약해진 새는 이미 포식자의 먹이가 되었거나 그게 아니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위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새들에게는 오랜 질병이나 노쇠라는 게 없다. 만약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이어지면 자연은 서둘러 그 생명을 거두어간다. 너무 가혹하다고? 이미 다 한 생명을 억지고 연장하고 불치병 환자나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을 계속 고통 속에 살도록, 계속 견디도록 강요하는 게 잔인하지 않을까? 자연은 고통이 오래가도록 두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최후의 순간은 언제나 짧다.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쇠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들의 세계에서, 삶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다......그렇기에 새들은 애초에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새들은 지금 삶 속에 완벽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과 자기 자신 사이에 그 어떤 작은 틈새도 없다. 새들은 미래의 무언가를 바꾸려 하지 않고 단순히 지금을 산다......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될 일이다.”p.188~p.191
 
생각해 보면 죽음과 삶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방식입니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으니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새를 예로 들면 죽고 나서 흙 속의 지렁이나 꽃의 뿌리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지렁이와 꽃은 다시 새의 먹이가 되기를 반복합니다. 새는 그것이 죽음이든 삶이든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저자의 글 속에서 “이미 다 한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고 불치병 환자나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을 계속 고통 속에 살도록, 계속 견디도록 강요하는 게 잔인하지 않을까?”라고 의문을 던집니다. 인간사회는 어떻습니까? 죽어가는 육체를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병원으로 보내고 그 과정에서 무리한 수술과 다량의 약물을 투여합니다. 병을 고치려다가 또 다른 병을 얻게 됩니다. 환자의 의식이 남아날 일이 없습니다.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지만 역설적이게 인간의 자발적이고 편안한 죽음을 방해합니다. 고통 속에서 생을 연명하게 합니다. 새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 중에 어떤 죽음이 더 존엄한 것일까요?
 
새들은 오르지 지금을 산다
지금의 삶 속에서 완벽히 존재한다.
새들은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행복을 경험할 뿐이다.
 

If only we were as satisfied with ourselves and our lives as the blackbird is. Surely we would be much more cont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