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1. 이방인과 김화영교수
오랜만에 사계절 출판사가 펴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이방인( L'Étranger )』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책 표지에서 책을 번역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이름이 더 친근하게 와닿았습니다. 1986년부터 2009년까지 무려 23년의 세월을 들여 전 20권의 카뮈 전집을 완역했으니 학자로서의 삶을 거의 카뮈와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불문학자의 집념과 열정이 한없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카뮈의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 모든 작품을 한 사람이 모두 번역한 예는 김화영 교수가 처음일 것입니다.
품격 있고 유려하게 구어체와 문어체 사이에서 문학작품 특유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없었다면 카뮈의 글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하고 이해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김화영 교수가 한 인터뷰에서 카뮈 전집 번역 과정에서 제일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카뮈가 구사한 프랑스어는 매우 스탠더드 한 편이어서 번역은 어떻게든 해 내었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번역을 끝내고 작품에 해제를 쓰는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번역가는 해제라기보다는 번역 과정에서 느낀 단상을 간략하게 쓰거나 그것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화영 교수는 카뮈 전공자로 그런 편법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을 읽다 보니 160페이지가 소설이라면 해설과 연보가 140페이지나 되어 소설만큼이나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최근 김화영 교수가 카뮈 전집의 개정판 작업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오기나 누락된 부분을 바로잡고 변화한 시대에 맞게 새로운 표기와 문장으로 다듬는 작업이라고 하니 팔십이 넘은 노익장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2. 태양살인의 전말
알베르 카뮈는 1942년 발표한 소설 『이방인』으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고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카뮈는 죽기까지 어디를 가나 명사였습니다. 그가 직접 라디오에 나와 『이방인』을 낭독한 육성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들어보면 카뮈의 낭창낭창한 불어 발음과 낮고 짙은 음색이 매력적입니다. 소설의 도발적인 첫 구절은 매우 유명합니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주인공 뫼르소(Meursault)의 이름은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을 의미하는 단어의 앞부분을 따와 조합했습니다. 카뮈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봐야 합니다. 뫼르소를 어떻게든 태양과 엮일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설정해 놓은 것입니다.
알제리의 태양은 세계 어느 곳보다 뜨겁다고 합니다. 어려서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카뮈는 작렬하는 태양을 수도 없이 봤을 것입니다. 소설 속 가장 큰 궁금증은 ‘태양이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나?’입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유일한 범행동기가 태양빛이 밝게 비췄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빛에 홀려 늑대인간이 되었거나 구미호가 되었다면 모를까, 태양에 홀려 살인을 했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저는 여기에 카뮈가 고도의 상징성을 덧입혔다고 생각합니다.
뫼르소에게 태양이란 따스함이 아니라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게 하는 뜨거움입니다. 소설에서 뫼르소는 곳곳에서 태양을 마주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피로와 지겨움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뜨거운 태양이 처음 등장합니다. 뫼르소는 장례일 아침에 떠오른 태양을 보고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겠다고 생각하지만, 영구차를 따라가면서 정오의 태양을 쬘 때는 어지럽고 견딜 수 없다면서 불안해합니다. 그에게 태양은 그가 마주친 힘겨운 감정과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오늘은, 풍경을 전율케 하면서 천지에 넘쳐나는 햇빛으로 인하여 이 고장은 비인간적이고도 사람의 기를 꺾어 놓는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p.34
결국 그는 태양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소설 1부의 마지막은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으로 소설 전체에서 가장 황홀하고 드라마틱한 부분입니다. 연극의 대사처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소리를 내어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덮인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사람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리어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올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 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뜨거운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 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비 오듯 쏟아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7~88
소설 속의 뫼르소는 세상이 원하는 삶, 윤리와 규범으로 스스로를 테두리에 가두는 평범함을 거부하는 인간입니다. 즉,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말하고 실천하며 자신이 왜 다른 군상들과 다른지조차 의식하지 않는 실존적인 인간형입니다. 뫼르소는 절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마리와 연애할 때 머리가 “너, 나 사랑하니?”라고 물으면 뫼르소는 의미 없어 하면서 굳이 대답하면 사랑을 안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마리가 결혼하자고 하면 그래라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물어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는 섭섭해하면서도 뫼르소의 솔직한 모습을 좋아합니다. 뫼르소는 사랑이든 결혼이든 이분법적인 세계를 낯설어합니다. 그야말로 이방인입니다. 뫼르소가 대답하는 방식이 어쩌면 뫼르소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살인을 감행한 결정적 순간은 아랍인의 뽑아든 단도에서 눈부신 태양빛의 칼날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칼날 같은 빛은 뫼르소의 손 눈썹을 쑤시고 두 눈을 파헤쳤습니다. 태양은 늘 뫼르소 곁에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래식에서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내는 빛을 견딜 수 없다고 했지만 그때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레몽과 함께 거닐던 해변에서도 태양이 찍어 누르듯 세차게 내리쪼였지만 그뿐이었지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뫼르소가 우발적 살인을 하게된 것은 태양빛이 칼날 위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태양이 단도의 칼날 위에 머무르지 않고 지나갔어도, 뫼르소는 절대 방아쇠를 당기기 않았을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 태양이 아랍인의 칼날 속에 멈추어 뫼르소의 이마를 쑤시고 눈을 파헤쳤을 때, 다른 말로 태양 빛이 뫼르소를 공격했을 때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누구나 조리있게 돌아가는 평범한 이세상이 낯선 타자가 되어 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본연의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태양빛은 커다란 심벌즈 소리를 내며 날카롭게 한낮의 균형과, 뫼르소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모두 깨뜨려버렸습니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쏜 것이 아닙니다. 칼날에 머물러 있는 그 빛의 억압을 향해 도발을 한 것입니다. "뭐냐~~ 너는!!!!" 뫼르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3. 이방인이 되는 길
도덕이나 경제, 법치의 원리는 매우 치밀해 보이지만 뫼르소가 볼 때에는 허위이고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세상은 허위의식으로 가득합니다. 그 적나라한 모습이 소설 2부에 나오는 감옥과 법정의 모습입니다. 살인죄로 잡혀 들어간 뫼르소는 결국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고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엉뚱한 죄로 처벌받습니다. 재판에서 범행동기로 자백한 태양에 대한 항변은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뫼르소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시비가 법정에서 근엄하게 벌어집니다. 검사는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하였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합니다”를 외치고 변호사는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가 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를 외쳐 방청객들이 웃고 맙니다. 뫼르소는 자신을 위한 재판이건만 자신도 타인이 되어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뫼르소는 이 허망한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법정에서 다시 감옥으로 가는 차에서 풍경을 보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법정은 폐정되었다. 재판소로부터 나와 차를 타러 가면서, 나는 매우 짧은 한순간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느꼈다. 어두컴컴한 호송차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한 도시, 그리고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어떤 시각의 귀에 익은 소리들을, 마치 자신의 피로한 마음속으로부터 찾아내듯이 하나씩 다시 들을 수 있었다.” p.128
뫼르소는 감옥 안에서 자유를 만끽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오히려 죽음을 뒤로하고 삶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약혼자’를 두어 생애를 다시 시작하려는 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됩니다.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p.159
뫼르소는 감옥에서 ‘나’를 인식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세계와 만났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연속성에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잣대를 버리고 그냥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시지프스가 힘겹게 바위를 다시 올리는 행위는 도덕의 세계에서 보면 형벌이지만 카뮈에게는 인간의 자긍심입니다. 부조리한 삶을 인정해 버리는 과감한 행위이고 운명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유로 삼아버리는 역설입니다.
그렇게 소설을 읽으면 소설의 마지막이 조금은 더 이해가 됩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p.159
자신의 세계와 마주한 행복은 축제와도 같은 것일 겁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끝을 내어 무섭기도 하지만 덕분에 죽음은 축제의 현장이 되어버립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다 간 하루가 남이 원하는 사람으로 살다 간 천일보다 행복한 법입니다. 『이방인』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뫼르소의 무심함과 공허함을 통해,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나라는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은 소설 속 뫼르소처럼 이방인이 되어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죽음이 아니라 삶이고, 축제라면 어떨까요? “부조리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는 또다시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카뮈가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 뫼르소가 경험한 알제리 해변의 칼날 같은 빛이 우리 눈에 머물 때 우리는 과연 태양이라는 광명에 맞서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지 책을 덮으며 생각하게 됩니다.

"이방인은 사실주의도 아니고 환상적 장르도 아닙니다. 나로서는 오히려 육화된 신화, 그것도 삶의 살과 열기 속에 깊이 뿌리박힌 신화라고 봅니다...뫼르소로 말하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뫼르소는 판사들이나 사회의 법칙이나 판에 박힌 감정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 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 존재합니다." 까뮈, 1954년 이방인에 대한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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