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서는 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에 대한 부분을 쓸 때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고 합니다. 독일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책에 죽음에 대한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법원 판사로 있다가 마흔다섯에 죽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 판사 몇 명이 조문하면서 소설이 시작합니다. 그다음부터는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삶을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천천히 이야기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당대 부르주아 계급이 일반적으로 추구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즐겁고 편안하며 법도에 맞는 인생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고위직 연봉을 받기 위해, 귀족층의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멋진 집을 구입하고 교양과 품위를 위해 브리지 게임을 즐기고 하층민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자기기만적인 허위의식이 가득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따지지 않습니다. 상류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톨스토이가 볼 때 이반 일리치가 대표하는 당대 귀족, 성직자, 경제적 특권층의 삶은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모두가 선망하는 삶이지만 이들은 철저히 우월한 도덕의식과 종교적 은총에 숨어 죄를 짓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악을 나서서 저지르지 않았기에 죄의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철저한 자기 보호 전략입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이 찾아 오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하는 삶에 대한 회의. 그리고 끝없는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머리를 쑤시는 통증, 역겨운 냄새, 심장이 죄어드는 아찔한 고통이 찾아왔으나 더 괴로운 것은 죽음 자체였습니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삶의 기준대로 살아온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 이르러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거듭 묻습니다.
내가 없다면, 그럼 뭐가 있을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면 대체 나는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 정녕 죽음인가? 안돼 싫어.
죽음은 철저히 고독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이반 일리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이 다만 죽음을 보면서 몸을 떨 뿐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고 봤습니다. 바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입니다. 죽은 다음 후회하지 말고 죽기 전에 자신이 주인이 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라는 도덕적 권고로는 이 책의 의미를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절대 고독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둘러싼 거짓과 그 거짓 속에서 자기 죽음을 감당할 때 피할 수 없이 대면하는 것이 절대 고독입니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헛살았고 삶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혼절했다가 깨어나자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손을 잡은 채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깨닫습니다.
"그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을 나뒹굴며 빛을 보았고, 자기 인생에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바로잡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것’이 대체 뭐냐고 자문한 뒤 귀를 기울이며 잠잠해졌다. 그때 누가 손에 입을 맞추고 있음을 느꼈다. 눈을 뜨고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아들이 가엾었다. "
‘그렇다. 나는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저들은 괴로워하겠지만 그래도 한결 좋아지리라.’ 그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으나 내뱉을 힘이 없었다. ‘하긴 굳이 뭐 하러 말해, 행동으로 보이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타인이 가엾어지는 순간. 지금까지는 죽음을 거부했지만 처음으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과 죽음을 분리해 놓았던 담을 허물어 버립니다. 편안한 삶을 위해 죽음을 멀리 했지만 이제 죽음을 맞이하며 편안한 삶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고통이 없다면 죽음도 없겠지. 이반 일리치가 구멍 속을 나뒹굴다가 본 것은 죽음의 자리에 있던 빛이었습니다. 죽음의 찰나에 이반 일리치는 큰소리로 외칩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갑자기 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기쁠수가!”
누군가 이반 일리치에게 사망선고를 합니다.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 보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끝난 건 죽음이야.’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없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쭉 뻗은 채 죽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왔든 죽음의 순간에 아들을 바라보며 연민과 슬픔의 감정을 이해했습니다. 죽음이 주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 주는 고통에서 환희를 느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이반 일리치가 스스로 선택한 존엄한 죽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없다.’라고 한 것은 ‘자신에게 죽음이 의미 없다’는 말입니다.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멈춘’ 것은 스스로 숨을 쉬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며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평안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남들에게 보이는 삶을 위해 45년의 인생을 살았지만 죽음의 순간만큼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을 넘어선 것은 이반 일리치의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의미가 무엇인지 소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삶의 평안함이 아니라 사랑의 순간을 환희로 맞이하며 죽음으로 이어지는 완전한 해방, 그것은 부활이란 말과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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