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와 산책』

『시와 산책』에 대해서 책을 읽기 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2020년 6월에 1쇄를 찍었고 5년 동안 28쇄를 찍었다. 입소문을 탔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꾸준히 이 책을 읽어 왔다는 말이다. 170페이지라는 두께와 가벼운 무게감, ‘시간의 흐름’이라는 출판사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어디 문학상을 받았다는 흔한 추천사가 없어서 더 좋았다. 책을 넘기니 첫 번째 작품 「온 우주보다 더 큰」의 한 단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열 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이 문장 만으로도 책을 읽고 싶기에 충분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와 산책을 좋아한다는 것, 20대 안성에서 4년을 살며 대학교 문창과를 나왔다는 것, 40대에 접어들었다는 것,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꿈이 할머니 수녀였다는 것 등 어떻게 보면 평범했다. 책 표지 안쪽에 아마도 한정원씨 본인이 쓴 듯한 개인 프로필이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최소한의 배려로 그렇게 썼을 것이다.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 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프로필의 내용이 정겨웠던 이유는 한정원씨가 살면서 얻은 것에 대한 과시가 없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했었지만 무엇에 대한 큰 성과가 없을 수 있다는 다짐같은 글, 담담한 인생. 대신 그녀의 관심이 무엇이고, 무엇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풍경도 있지만 자세히 봐야 보이는 아련한 속내도 있다. 활자를 꾹꾹 눈으로 눌러가며 읽어야 제맛이다. 시적인 상상이 필요한 차분한 글의 흐름에 못견뎌 극적인 서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될듯. 나이가 들면 모를까. 글을 읽는 것은 작가를 읽는 것과 같다. 작가는 글을 벗어나 독립할 수 없다. 책을 통해 전해지는 한정원 작가는 다정하고 정갈하고 시선이 따뜻하며 존재가 오롯하다.
『시와 산책』은 거침없이 읽는 책이 아니라 아껴서 읽어야 할 책일지 모르겠다. 한 번 훅 읽어내는 호기를 부리기에는 글을 쓴 작가의 노고에 미안스럽다. 책을 읽다가 생각에 잠겨 짧은 휴지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고 그녀가 글에서 인용한 시집을 찾아 읽고 싶어 서점을 헤맬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녀의 바람대로 작가의 이름보다 소박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문장만 기억에 남았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서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p.19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울타리를 지나서 바다 반대편 고사목 쪽으로 와. 일렁이는 가는 물줄기가 보이면, 푸른 나무에 둘러싸일 때까지 상류로 올라와. 해가 지는 쪽으로 물길을 따라오면 평평하고 탁 트인 땅이 나오는데, 거기가 나의 집이야. p.23 인디언 소녀의 글 <산책이 시가 될 때>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p.25 <산책이 시가 될 때>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p.30 <행복을 믿으세요?>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무서워한다. 순서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겁을 먹었던 건, 칠흑의 어둠 속에 어떤 얼굴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어느 마당에 어떤 나무와 꽃이 피는지까지 알게 되었을 때, 더는 밤길이 힘들지 않았다. 앞, 옆, 뒤가 아니라 별이 흐리게 묻힌 하늘을 볼 수도 있었다. 불이 꺼진 창도, 그 창 너머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감은 눈꺼풀처럼 순하게만 보였다. p.47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p.55 <과일이 둥근 것은>
혹시 나에게는 불 대신 빛이 있을지. 불을 지를 수는 없지만 당신을 환하게 비출 수는 있을지. 은은하게 나의 사랑을 연명해 나갈 수도 있을지. 벅찬 여름을 지나며, 그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p.61 <여름을 닮은 사랑>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내가 귀하게 여기는 한 구절이다.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p.68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강은 늘 나를 두고 멀리 가버렸다. 강 앞에서 나는 언제나 서운한 사람이 되었다. 과묵한 강과 달리, 바다는 우선 떠들썩했다. 자꾸 내 앞으로 달려와 발목을 잡았다. 강이 나를 따돌리는 친구였다면, 바다는 내가 시큰둥해도 거듭 다가와 말을 거는 속없이 다정한 친구 같았다. p.77 <바다에서 바다까지>
나는 언니 대신 남자의 하숙집 방문 틈에 편지를 끼워 놓고 오기 위해, 어른들 몰래 대문을 나섰다. 대문 밖은 깜깜하고 추운데 나는 추운 줄 몰랐다. 더운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선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내 마음처럼 뿌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p.86 <아무것도 몰라요>
얼마나 많은 불운이 우리를 숨어 기다리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책으로 겪는 불행만으로 몸을 떨었던 스무 살의 우리. 정말 모든 것들은 하룻밤 사이에 왔다. 어둡고 차가운 것일수록 더 빠르게. 시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시인의 불행은 우리 것이 되기도 했다. p.110<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 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저녁은 그렇게, 시를 읽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 p.125 <저녁이 왔을 뿐>
삶의 마디마다 기꺼이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선택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벙점은 '기까이' 라는 말 위에 찍혀야 할 것이다. 기꺼이 떨어지고 기꺼이 태어날 것. 무게에 지지 않은 채 깊이를 획득하는 일은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p.137 <회색의 힘>
봄이 짧다는 탄식은 어쩌면 봄꽃만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대개는 봄꽃 특히 벚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을 실감하는데 벚꽃이 만발하는 기간은 열흘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벚꽃이 지고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습관적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다. “금방 여름 오는 거 아냐? 중간이 없어, 중간이.” 사실은, 중간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때만은 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p.147 <고양이는 꽃 속에>
산책자는 걸을 때만큼은 자신의 ‘몸’보다 ‘몸이 아니 것’에 시선을 둔다. 지난밤의 꿈을 생각하고, 함께 나는 이야기를 혼자 복기하고, 궁금해하다가 미뤄둔 질문을 다시 꺼내보고, 까맣게 잊었던 얼굴은 문득 보고 싶어 하다가,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의 모자와 나무를 타는 다람쥐까지 일별 한다. 그의 사유는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도 같다. p.155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
나무는 말이 없어요. 밤도 묵묵해요. 신은 별처럼 숨만 쉬어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침묵하기만 합니다. p.171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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