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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일탐

한자와 한문에 대한 기본 이해

by 하늘밑 2025. 6. 30.

한자와 한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한자라는 문자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반도의 문자는 한자였다. 왕조의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신화적 상상력의 시대를 기록할 때조차 한자는 정통적인 문자였으며 <문자>란 말은 다름 아닌 <한자>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었다. 한자는 우리에게 일상이었고 삶 그 자체였다.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는 언어음성을 베껴내는 역할을 한다. 한자도 그럴까? 한자는 기호라기보다 의미이자 상징이다. 청각에서 청각으로 전달되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며 메타언어적인 속성이 강하다. 한자가 만일 그러한 의미적 기능이 없었다면 3,000년에 걸친 한자문화권이라는 통시적 문화공간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자는 상징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의 사유와 철학의 세계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2.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
 
한자는 형(모양)․소리(음), 뜻(의)라고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한자의 본질은 3요소의 상관관계에 있다.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는 중국 주나라 시대부터 알려져 있던 <육서>라는 분류법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서기 100년경 후한시대 허신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육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 <상형(象形)>은 모양을 본뜻 것이다. → 한자의 근간
② <지사(指事)>은 추상적인 일을 가리킨다. → 한서예문지는 상사(象事)라고 함
③ <회의(會意)>은 뜻을 모은 것이다. → <상형>과 <지사>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함
④ <형성(形聲))>은 음을 나타내는 음부(音符)와 의미를 나타내는 의부(義部)를 조합한다. → 한서예문지는 상성(象聲)이라고 함. 오늘날 사용하는 한자의 80%~90%가 형성자다.
⑤ <전주(轉注)>는 같은 모양의 한자가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혹은 같은 뜻을 지닌 한자들이 서로 풀이의 관계에 있는 것[고(考)와 노(老)의 관계처럼] 전주는 형전설, 의전설 등 다양함 → 樂(음악 악) 樂(즐거울 락) 樂(좋아하다 요)
⑥ <가차(假借)>는 의미가 다른 글자를 같은 음이나 비슷한 음의 단어에 맞추어 사용함 → 求(구)는 원래 ‘가죽’이란 뜻이었으나 ‘구하다’란 뜻으로 쓰이면서 ‘裘(갓옷구)’란 한자를 따로 만들었다.
 
☞ 상형과 지사는 ‘문(文)’을 만드는 방법, 회의와 형성은 ‘자(字)’를 만드는 방법, 전주와 가차는 ‘용자(用字)’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3. 위대한 발견, 갑골문자
 
갑골문(甲骨文)은 한자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상형문자이다. 거북이 배딱지(腹甲)를 나타내는 갑(甲)자와 짐승의 견갑골을 표현한 골(骨)자를 합하여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명명하였다. 갑골문은 중국 청나라 말엽인 1899년에 안양현 소둔촌, 상의 수도였던 은허(殷墟)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발굴된 뼈 연대는 대부분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50년으로 상말기에 해당한다. 현재까지 십육만 편, 오천 자가 발견되어 그중에 천자 정도가 완벽히 해독되었다. 갑골은 세계 각국 박물관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다. 갑골문은 주로 점술에 사용되었다. 은나라 사람들은 거북이의 배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뜨거운 심지를 올려 열에 의해 갈라지는 점괘를 뽑았다. 갑골문은 점괘를 갑골에 새긴 기록이다. 갑골문의 내용은 제사·풍우·전렵(田獵)·농경·군사·사명(使命)·질병·복점 등이다.
 

 
4. 허신은 갑골문자의 존재를 몰랐다.
 
허신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한자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황제의 신하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의 발자국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소개하였다. 한자의 기원을 몰랐던 당시 한자의 긴원은 신화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허신이 만약 갑골문자의 존재를 알았다면 설문해자의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다. 허신의 문자학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가 문자 성립기의 가장 오래된 자료인 갑골문과 금문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다.
 
예1) 오늘날 ‘대머리’라는 뜻으로 쓰이는 독(禿)은 벼나 보리의 열매가 떨어져 나간 형태이다. 그런데 허신은 독(禿)을 ‘머리카락 없음(無髮)이다’라고 하여 문자의 창시자인 창힐이 벼가 무성한 곳에서 대머리 사람을 발견하고 ‘禾’와 ‘人’을 합하여 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 왕육(王育)의 학설을 인용했다.(王育說:蒼頡出見秃人伏禾中, 因以制字.)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주석한 단옥재도 “일시적인 일로 1,000년토록 사용하는 글자를 정했을 리 없다(因一時之偶見,遂定千古之書契)”고 하여 이 설을 부정했을 정도다.
 
예2) 허신은 ‘東’이 해가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하였다.(从日在木中). 이는 소전을 기준으로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나타내므로 중국인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 연구가 진행되며 설문해자의 오류가 발견되었다. 갑골문에서는 ‘東’이 주머니 탁(囊)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자가 동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은 단순히 ‘동쪽’과 ‘주머니’를 뜻하는 어휘의 발음이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5.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세계, 문자의 코스몰로지
 
『설문해자(說文解字)』 자서에서 허신은 “생각건대 문자란 학문의 기본이며 군왕에 의한 통치의 기초이다. 또한 한 시대 사람들이 후세에 모범을 드리우는 도구이자 도시에 후세 사람들이 앞 시대를 배우는 도구이다”라고 했다. 즉 경서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규범을 서술한 책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문자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의 올바른 해석을 얻기 위해서는 문자 한 글자 한 글자의 올바른 해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더구나 당시 금문학자들에 의해 혼란을 겪고 있는 경서의 해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자의 올바른 해석이 필요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만든 목적인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현재의 자전은 『강희자전(康熙字典)』의 부수법을 따라 부수자를 214자로 분류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9,353자를 540개의 부수로 분류하였다. 『강희자전(康熙字典)』이 문자를 빨리 찾기 위한 실용적인 분류법을 택했다면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문자의 검색을 안중에 두지 않은 매우 불편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려(慮)’는 ‘心’부의 11획 글자지만 <설문해자>에는 ‘心’부에도 ‘虎’부에도 ‘慮’자가 없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思’부에 ‘慮’자가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글자를 쉽게 찾기 위해 부수를 540개로 분류한 것이 아니었다. 허신의 의도는 540개로 이루어진 부에 문자를 수납하여 문자를 매개로 한 철학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540이란 54의 10배이다. 54란 6과 9의 누적이다. 6과 9란 <역>에서 음과 양을 상징하는 수이다. 즉 만물을 구성하는 두 요인인 음과 양을 상징하는 숫자를 곱하여 ‘54’라는 수를 <설문해자>는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표현한 양효와 음효의 철학적 원리를 체득하고 6×9×10=540의 수로 이루어진 부를 세워 문자를 수록한 것이다. 그 부의 배열에는 천․지.인 삼재의 사상을 살렸다. 하늘과 도를 나타내는 ‘一’은 책의 처음에, 땅을 상징하는 ‘二’는 책의 말미에, 사람을 상징하는 부는 책 전체의 중간인 8현 上에 두었다. 즉 천.지.인 삼재의 철학을 문자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삼라만상을 운동하게 하는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로 끝마쳤다.
 
허신이 문자학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음양이원론과 천인상관(天人相關)의 자연관이 한자의 문자체계와 일치를 이룬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허신은 <역>의 사상체계를 본받아 세상을 문자의 차원에서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는 그는 문자를 나열함으로써 우주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문자의 코스몰로지(우주론)이며 자연적 질서였다.
 

 
6. 한자는 모사인가? 상징인가?

 

한자의 상징성은 단순한 언어 기호를 넘어, 오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담고 있어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각 한자는 형태, 소리, 의미의 결합으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복잡한 개념이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7. 한자의 전래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래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략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본다. 기원전 195년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중국 땅에서 고조선으로 건너와 위만 조선을 세웠고, 기원전 108년에는 중국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이 무렵 중국과의 접촉을 통해 한자가 우리 민족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뒤로 삼국시대에 중국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면서 본격적으로 한자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이미 한자를 활발하게 사용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일본에 한자를 전해 주기도 했다. 신라는 중국 전진과 활발하게 외교 관계를 맺었던 내물왕 때부터 한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는 6세기 무렵부터 완전한 한문 문장을 기록문체로 사용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매지권(買地券)은 대표적인 예이다.
 
1) 완전한 한문 문장의 등장 → 무녕왕지석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525)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2) 우리말 어순의 변격한문 → 임신서기석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고 기록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니고 지키며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져도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지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기를 시(詩)·상서·예·전(傳:춘추좌전)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
→ 이 글이 정격한문이었다면 忠道執持는 執持忠道로, 天大罪得誓는 誓得大罪於天으로 써야 할 것이다.
 
8. 말과 글의 불일치 차자표기법의 시작
 
우리말을 한자·한문으로 표기하기는 어려웠다. 즉 말과 글이 서로 달라 우리 조상들은 말과는 별도로 한자와 한문을 배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한자를 가지고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이 등장하게 되었다.
 
1) 향찰
 
독자적인 문자가 없던 고대, 향찰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기록한 차자표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향찰문학은 『삼국유사』에 삼국·신라시대의 향가 14수, 『균여전』에 고려 초의 향가 11수와 고려 예종의 ‘도이장가’ 등 총 26수의 시가가 전해지고 있다. 향찰의 표기는 어절을 단위로, ‘훈독(訓讀)+음독(音讀)’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단어의 개념이나 의미는 한자의 뜻을 살리고, 조사나 어미같은 문법관계 등은 한자의 음을 이용했다

 
2) 이두
 
이두는 한문을 우리말의 어순에 맞춰 재배열하고 일부 부사 등에 한자를 차용한 것이고, 향찰은 한문과 관계없이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완전히 표기했다.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전 등의 중인층은 한문 구사 능력이 지배층만큼 능숙하지 못하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을 동원하여 글의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어순을 한문의 어순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 등을 보충해서 표기한 변형된 한문인 이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두는 신라 뒤인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썼으며, 쓰는 이에 따라 조금씩 쓰는 방식도 글자로 바뀌고 변화했다.

3) 구결
 
구결은 중국 한문이 우리말과 말 순서가 다르고 우리말에 많은 토씨가 없어서 우리말식으로 편리하게 읽으려고 한문 낱말이나 구절 사이에 토를 달아서 쓴 글이다. '입겾' 또는 '입겿'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였다. 주로 불교나 유교의 경전을 읽을 때 적당한 곳에서 끊어 읽기를 하거나 그 앞뒤 표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나타내었다. 구결의 모양은 주로 한자 초서체나 약자체를 본떠서 만들었다. 구결은 한자 뜻으로 읽는 석독(훈독)구결과 소리로 읽는 음독구결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석독구결이 많이 쓰이다가 뒤에는 음독(순독) 구결이 많이 쓰였다.
 

① 음독구결
 
가. 樊遲 問仁한대 子曰 愛人이니라 (論語 顏淵)
나. 樊遲 問仁爲隱大 子曰 愛人是尼羅
 
 
② 석독구결


석독구결(釋讀口訣)은 한문으로 쓰인 불경을 한국어로 풀어 읽을 수 있도록 토를 단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현토 당시의 한국어 문법형태의 쓰임이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만 아니라 어순까지 표시돼 있어 15세기 이전의 한국어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한문을 직접 우리말의 어순대로 읽을 수 있도록 토를 달아 표현하였다. 쉽게 말해 일종의 번역이다.
 
2000년 7월, 아주 새로운 형태의 석독구결이 발견됐다. 일반적인 문자가 아닌 점과 선 모양의 기호를 특정 위치에 기입해 넣는 방식인 ‘점토구결(각필구결)’의 방식이다. 10~12세기 한문으로 쓰인 불교경전을 그 당시의 한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뾰족하고 날카로운 각필을 이용해 토를 달았음이 확인된 것이다. 각필이란 상아나 나무, 대나무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필기구로, 그 끝으로 종이를 눌러 문자, 부호, 그림을 표시한다.
 

 
9. 일본의 훈독

 

① 일본의 훈독문화

 

일본어 훈독(訓読)은 한자를 일본어 고유어 단어의 의미에 맞춰 읽는 방식이다. 즉, 한자의 음(音)을 읽는 음독(音読)과는 달리, 한자가 가진 뜻에 해당하는 일본어 단어의 발음으로 읽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일본 고유의 언어 문화와 한자 사용 방식이 결합된 독특한 특징이다.

 

日本 (일본): '니혼' 또는 '닛폰'으로 음독하지만, 'ひのもと(히노모토)'라고 훈독하여 '해가 뜨는 땅'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愛 (사랑): 'あい(아이)'로 음독하지만, 'こい(코이)'로 훈독하여 '사랑'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食べる (먹다): 'たべる(타베루)'는 '食'의 훈독이다.

 

② 오쿠리가나, 후리가나, 요미가나

 

* 오쿠리가나 (送り仮名): 동사나 형용사 등 활용되는 단어의 어미 부분에 붙는 히라가나를 의미한다. 이는 단어의 활용 형태를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書く」, 「書きたい」, 「書きます」와 같이 어미가 변하는 부분에 사용한다.

 

* 후리가나 (振 り 仮名):  한자 위에 작게 표기되는 히라가나나 가타카나로, 한자의 발음을 나타냅니다. 주로 독서 보조, 초급 학습자를 위한 교재 등에서 사용한다.  예를 들어, 「食べる」라는 단어에서 「食」 위에 「た」, 「べ」, 「る」를 작은 글씨로 표기하여 발음을 나타내는 것이 후리가나이다.. 

 

* 요미가나 (読 み 仮名): 넓은 의미로는 단어 전체의 읽는 법을 표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좁게는 후리가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어 시험 등에서 "요미가나를 쓰세요"라는 문제는 단어의 발음을 히라가나로 쓰라는 말이다.

 

*후리가나와 요미가나는 서로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정확하게는 후리가나는 한자 위에 표기되는 발음 표기, 오쿠리가나는 활용어미에 붙는 히라가나, 요미가나는 넓은 의미로 발음 표기 전체를 의미한다.

 


10. 한글의 창제
 
우리말 속의 어미변화 및 각종 조사 표지는 단음절의 표의문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자가 서로 통일되지 않는 모습을 해결하기 위해 ‘이두’, ‘구결’ 등의 표기방식을 발명하긴 하였으나 일부 경전을 읽거나 공문서를 작성하는 데는 유용했던 반면 우리 언어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한자 때문에 표음과 표의, 두 가지를 모두 소홀히 하여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집필하여 한민족 자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했다 한글은 일종의 병음문자로 11개의 모음과 17개의 자음 모두 28개의 자모이다. 비록 한글과 표의적 한자의 성질은 다르지만 어음의 표현, 자형의 구조상에는 여전히 한자의 영향을 받았다.
 
한글의 창제는 하층민은 환영을 받았고 민간 창작에서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상류사회와 사대부들은 한글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계속해서 한자와 한문을 사용했다. 오랜 기간 동안 관부의 정식문서와 문인의 각종 창작물들은 여전히 한자와 한문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한반도에는 두 종류의 문자와 두 종류의 문체가 출현했다. 하나는 아(雅) 문화를 대표하는 한자와 한문체이고, 하나는 속(俗) 문화를 대표하는 한글과 국문체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명한 개화학자 유길준(俞吉濬)이 처음으로 창제한 국한혼용문체가 출현했다.
 
구두 권점은 한문의 구두가 끊어지는 자리 표시인데 구(句)와 두(讀)를 구별하여 행간의 가운데나 혹은 오른편에 표시한다.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각 문장의 중간이나 끝부분에 둥근 권점의 구두점이 쓰였다. 구두점은 구점(句點)과 두점(讀點)으로 나뉜다. 구점은 마침표, 두점은 쉼표다. 해례본에서는 마침표 권점은 문장 끝글자 오른쪽 아랫부분에 썼고, 쉼표 권점은 글자와 글자 가운데 부분에 썼다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법화경언해』(1463, 세조9) 등의 문헌에는 행간 가운데 권점으로 구점(句點)과 행관 오른편 권점으로 두점(讀點)을 각각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권점을 사용하거나 구두에 맞춰 사이를 떼어두어 한자와 한글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세종이 직접 지은 서문·예의 7쪽 중 4쪽이 사라진채 발견됐다. 총 66쪽 중 62쪽은 남아있다. 없어진 부분은 이용준 등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토대로 채워 넣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편하게 쓰고자 한다(便於日用耳)’에서 ‘이(耳)’자를 ‘의(矣)’자로 잘못 쓰는 등의 오류가 생겼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은 1448년(세종 30)에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이 간행한 운서(韻書)이다. 책 제목이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인 것처럼, 조선의 표준 한자음을 제정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물론 이러한 『동국정운』 편찬은 1443년(세종 25)에 한글이 창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즉, 『훈민정음』이 있었기에 한자음을 표음할 수 있었다. 18,801자의 한자음을 사성과 함께 2.205자의 한글로 적었다.

 


訓蒙字會(훈몽자회)는 조선 중종 22(1527)에 최세진이 어린이용 한자 교재로 집필한 책이다. 한자의 뜻과 소리를 한자로 적었으므로 한글 기본 학습을 일러두기로 실었다. 한글 자음 모음의 명칭과 기본 차례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11. 표점의 이해
 
표점(標點)은 문장 내 어휘의 성격 및 성분, 문장의 구조 등을 표시하는 부호(符號) 체계이다. 한글 표기에 쓰이는 문장부호와 비슷하나 일부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이십오사(二十五史)에 적용한 표점이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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