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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일탐

동림사 산중 생활의 깨달음

by 하늘밑 2025. 3. 31.

오성현(전남 화순의 옛 이름)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만연사가 있다. 만연사 동쪽에는 조용하게 도를 닦는 암자가 있다. 불경을 설법하는 스님이 그곳에 살았는데, 동림사라고 불렀다.
 
아버님이 오성현의 현령으로 부임한 이듬해 나는 둘째 형님(정약전)과 함께 동림사에서 겨울 동안 머문 적이 있다. 형님은 『상서』를, 나는 『맹자』를 읽었다.
 
처음 이 절에 올 때, 눈발은 가루처럼 흩날리고 골짜기 물은 얼어붙으려 했다. 산속 나무와 대나무의 빛깔도 추위에 파랗게 얼어있는 듯했다. 그 때문인지 아침저녁 산책을 나오면 정신이 맑아졌다.
 
잠에서 깨면 얼른 시냇물로 달려가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아침밥 먹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비구니들과 줄지어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 별이 보이기 시작하면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며 시를 읊조렸다. 밤이 되면 스님이 부르는 부처님의 공덕 찬양과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책을 읽곤 했다.
 
이런 생활을 40여 일 동안 하고 난 다음, 둘째 형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야 제가 중이 중노릇하는 까닭을 깨달았습니다. 중들은 부모나 형제, 처자식과 누리는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음탕한 소리를 하거나 예쁜 여자를 만나는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중노릇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 그런 것들과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형님과 제가 집 떠나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과 같은 즐거움이 있었을까요?”
 
둘째 형님이 이렇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아마 그것이 중이 중노릇을 할 수 있는 까닭이겠지.”
 
 
烏城縣北五里,有萬淵寺,萬淵之東,有靜修之院,僧之說經者居之,是曰東林。家君知縣之越明年冬,余與仲氏住棲東林,仲氏讀《尙書》,余讀《孟子》。時初雪糝地,澗泉欲氷,山林竹樹之色,皆蒼冷揫縮,晨夕消搖,神精淸肅。睡起,卽赴澗水,漱齒沃面,飯鍾動,與諸比丘列坐吃飯,昏星見,卽登臯歗詠,夜則聽偈語經聲,隨復讀書,如是者凡四十日。余曰:“僧之爲僧,吾乃今知之矣。夫無父母ㆍ兄弟ㆍ妻子之樂,無飮酒ㆍ食肉ㆍ淫聲ㆍ美色之娛,彼何苦爲僧哉?誠有以易此者也。吾兄弟游學已數年,嘗有如東林之樂乎?” 仲氏曰:“然,彼其所以爲僧也夫。” 정약용,「동림사독서기(東林寺讀書記)」『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루를 만족하고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동림사의 중들이 고통스러운 중노릇을 감내하는 이유가 다산 선생이 말한 내용과 일치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다산 선생의 말은 큰 깨달음을 준다. 아마 이 글을 쓴 때가 다산은 17세 정도, 그의 형인 약전은 21세 쯤 되었을 것이다. 정약전묘지명에 의하면 무술년(1778년)으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화순현감으로 발령받았을 때이다.  40여일 지났다고 한 것은 다산이 맹자를 거의 완독한 시점일 것이다. 아마 두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머물다가 책읽기를 핑계로 동림사에 함께 기거했을 것이다. 둘은 요순시대를 논하고 맹자의 호연지기를 논했을 것이 분명하다.
 
잠에서 깨어 시원한 시냇물로 세수를 하고 때에 맞춰 아침밥을 먹고 공부하다가 해가 지면 별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며 노래한다. 밤중에 들려오는 경건한 독송 소리에 책을 읽으며 잠이 든다.
 
다산이 느낀 산중의 즐거움이란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만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 사람은 무엇을 해서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무엇을 안 해야 행복해진다. 하루 종일 일하고, 운동을 하고,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정주행하고, 대화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자연과 소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가만 혼자 못 있기 때문일 것이고,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깊이 성찰하지 않아서일 것이고, 계속해서 삶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은 얼마나 크고 밤하늘 별의 수는 얼마로 가늠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작은가!
 

규장각본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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