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쳤는가? - 이규보(李奎報) 「광변(狂辨)」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나를 미쳤다고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미쳤는지 모른다. 내가 미친 짓 하는 것을 보았는가? 아니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는가? 내가 미쳤다고 한다면 내 행동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알몸이나 맨발로 물속이나 불 속에 뛰어들었나? 이가 으스러지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모래와 돌을 씹었던가? 하늘을 쳐다보고 욕을 해 대거나, 땅을 발로 차며 꾸짖듯 소리를 질렀는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부짖기라도 했나? 잠방이를 벗고 던지고 뛰어다녔던가? 겨울이 추운 줄 모르고 여름이 더운 줄 몰랐나? 바람을 잡으려 하고, 달을 붙들려하던가? 이런 일을 했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는데 왜 나를 미쳤다고 하는가?
아! 세상 사람은 평소에 생김새나 말투, 옷차림은 정상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벼슬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손은 하나인데 손놀림이 전과 같지 않고 마음은 하나인데 옳지 못한 두 마음으로 바르게 살지 못한다.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고, 동서를 구분하지 못하며 서로 속이고 어지러워서 중용을 유지할 줄 모른다. 결국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엎어지고 뒤집어진 뒤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하더라도 속은 분명히 미쳤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물이나 불 속에 뛰어들거나 모래와 돌을 씹어 먹는 사람보다 더 심하게 미친 것이 아닐까?
아, 세상에는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은데, 그런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왜 나를 미쳤다고 비웃는가? 나는 미친 것이 아니다. 행적은 미친 듯하더라도 속마음은 올바르다.
世之人皆言居士之狂。居士非狂也。凡言居士之狂者。此豈狂之尤甚者乎。彼且聞之歟。視之歟。士之狂。何似乎。裸身跣足。其水火是軼乎。傷齒血吻。其沙石是齧乎。仰而詬天咄咄乎。俯而叱地㪍㪍乎。散髮而號喝乎。脫褌而奔突乎。冬而不知其寒乎。夏而不知其熱乎。捉風乎。捕月乎。有此則已。苟無焉。何謂之狂哉。噫。世之人。當閑處平居。容貌言語。人如也。冠帶服飾。人如也。及一旦臨官莅公。手一也而上下無常。心一也而反側不同。倒目易聦。貿移西東。眩亂相蒙。不知復乎中。卒至喪轡失軌。僵仆顚躓然後已。此則外能儼然。而內實狂者也。玆狂也。不甚於向之軼水火齧沙石之類耶。噫。世之人。多有此狂。而不能救己也。又何假笑居士之狂哉。居士非狂也。狂其迹而正其意者也。-이규보(李奎報) 「광변(狂辨)」
* 이규보(李奎報:1169~1241)는 고려 무신정권기에 태어나 몽고항쟁이 한창이던 1241년에 피난지 강화에서 세상을 떠났다. 7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려사회는 내부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종래의 정치사회적 주도권을 빼앗긴 문인이나 지식인 집단들은 한편으로 반발과 좌절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실참여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농민이나 천민 같은 기층세력들도 지배집단의 권력갈등을 보면서 정치적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이규보는 최씨 무인 정권에 협조하여 입신출세하였던 기회주의적 관료였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럼에도 그가 무신정권이라는 부조리한 시대에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품고 풍자라는 문학의 형식을 빌어 자기 성찰의 글을 쉬지 않고 썼던 것은 문인으로서 양심의 일면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그는 『동국이상국집』 53권을 남긴 대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작품에서 ‘거사(居士)’는 그의 호 ‘백운거사(白雲居士)’를 말한다. 구름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갈구했던 그의 문학적 취향을 잘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이 ‘거사’로 자칭하는 이규보를 미쳤다고 한 근거는 무엇일까? 무시정권에 순응하며 철저한 보신으로 소극적 저항의 삶을 살았던 그에 대한 냉혹한 평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규보의 항변은 날 서고 서늘하다. 정말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다, 따로 있다는 말이다. 누가 미친 자들인가?
평소에는 멀쩡해 보여도 벼슬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두 마음을 품는 사람, 서로 속이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질주하는 사람,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파멸을 자초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거나 모래에 돌을 씹어대는 사람보다 더 미쳤다.
이규보는 자기의 행적이 미쳐 보일 수 있다는 말을 글의 말미에 덧붙였다. 그리 보일 수 있다는 변명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당대에 누가 자신보다 더 미쳤는지는 분명히 구별한 듯하다. 세상이 악하면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듯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거악(巨惡)을 알아볼 수 없다. 그저 자잘한 악의 처단에 황홀해하며 자기도 모르게 거악의 동조세력이 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군사정권 시기에 정의사회구현을 외쳤던 정신 나간 자들의 자기모순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우리 시대에 진짜 나쁜 놈, 진짜 미친놈은 누구일까? 너무나 자명하게 보이니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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