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서사의 위기』
『피로사회』(2012)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2023)에서 소설네트워크 서비스가 오히려 우리를 고립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스마트한 지배’에 인간 스스로를 예속시키는 도구라고 진단한다.
우리에게 희망을 만드는 미래 서사가 부족하다. 성경의 복음이 위대한 이유는 희망을 만드는 미래 서사였기 때문이다. 인스타가 유행하고 쇼츠가 대세인 요즘 스토리텔링은 그저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남이 혼자 사는 이야기를 지켜보고, 남이 먹는 음식을 감상하고, 남이 노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과도하게 DM과 카톡을 주고받고,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건다. 삶의 관조나 자성은 소통과 정보의 탐닉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느라 바쁘다. 그 기저에는 자신의 생활을 정보화하고 과시하여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보이고 싶은 삶을 살려는 강한 욕구와 다름 아니다.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비에만 몰두한다. 정보는 늘 종합적이지 못하고 파편화되고 만다.
가끔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유튜브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식들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 대화를 시도하면 원칙과 규율을 앞세워 듣기를 강요하고 꼰대 같은 말을 한다고 맞받는다. 편하게 하고 싶은 것 하며 재미있는 영상을 챙겨보는 것이 소화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리라. 아님 내가 유튜브보다 더 재미있게 해 주면 모를까, 그건 더 자신 없는 일이다. 나의 신세는 자극적인 스토리를 생산해 내지 못하고 버전만 바뀐 옛이야기로 리와인드만 반복하는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길고 느린 호흡으로 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는 그걸 인내하고 들어주는 대상과 경청과 집중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용납할 리가 없으니 지루할 수밖에 없다. 『서사의 위기』를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다. 스토리를 과소비하는 감각의 시대에는 다음 한강 작가의 글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 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 한강, 『희랍어시간』
책의 내용을 일부 정리해 보았다. 공감과 비판은 자기 몫이다.
스토리 중독시대 서사의 위기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서 스토리 중독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디지털로 된 종이의 숲인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 정보 사냥꾼들이 꿈의 새를 사냥하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과잉활동성 안에서 우리는 결코 깊은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보사회는 정신적 고도 긴장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보의 본질이 다름 아닌 놀라움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쓰나미는 우리의 지각 기관을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우리의 지각 기관은 더 이상 관조적 상태로 전화되지 못한다. 정보의 쓰나미는 주의를 파편화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와 귀 기울이기에 필요한 관조적 머무름을 방해한다.
현대인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소통의 주인이 아니다. 의식된 통제로부터 벗어난 정보의 교류에 몸을 내맡긴 상태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자기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내맡겨진다. 인간은 제어하고 착취할 수 있는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된다.
기억은 사건을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 내는 서사적 실천이다. 정보의 쓰나미는 서사적 내면성을 파괴한다. 탈서사화된 기억은 ‘고물상’ 즉 온갖 종류의 완전히 무질서한,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그림들과 오래되어 낡아빠진 상징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창고’와 같다.
근대의 대도시 사람들의 눈은 보호기능으로 과부하되어 있어서 관조적 머무름을 잊어간다. “보호하는 시선은 먼 것에 대한 꿈 꾸기를 상실하게 된다.” 화면은 현실을 이미지 속으로 잡아둔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현실로부터 차단한다. 우리는 이 현실을 거의 유일하게 디지털 화면을 통해서 인식한다. 이 현실은 화면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은 스마트폰에서 너무 축소되어 더 이상 충격의 순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충격은 ‘좋아요’로 대체된다.
빈지뷰잉(Binge Watching), 즉 생각 없는 시청이 시리즈 소비를 특징짓는다. 관찰자는 가축처럼 살찌워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신체기관은 늘어난 자극량에 적응한다. 지각은 점차 둔해진다. 자극방어가 일어나는 뇌피질은 흡사 굳은살로 뒤덮여간다. 의식의 가장 바깥층은 경화되고 ‘무기(無機))’의 상태로 변해간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칸트의 도덕법칙의 경우 매우 모험적인 이야기다. 이 이론에서는 도덕적 신이 행복을 ‘도덕성과 정확히 비례하도록’ 분배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덕을 위해 세속적 향유를 포기하고 그만큼을 도덕적 신에게서 행복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에 대한 칸트의 공리 역시 마찬가지로 모험적인 이야기다. 칸트에 따르면 ‘최고선의 실현’은 무한히 지속되는 존재를 전제하는데 이는 ‘감각계의 본질이 그의 삶의 어떠한 시점에서도 도덕법칙을 위한 심정을 완전히 적적한 정도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음을 넘어 최고의 선에 도달하기를 갈망함으로써 무한히 지속되는 미래의 전진을 진리로 가정하는 것이다. 영혼의 불사와 관련한 우화로서 칸트의 도덕법칙과 플라톤식 신화는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개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막힘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해했다. 막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
오늘날은 스토리텔링이 넘침에도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병원에서조차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의사들에겐 이야기를 경청할 시간도, 인내심도 없다. 효율의 논리는 이야기의 정신과 조화될 수없다. 심리치료와 정신분석만이 여전히 이야기의 치유력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타자가 누구인가다. 미하일엔데의 소설 속 주인공 모모는 자신의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둔다. 이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서사가 상업에 의해 본격적으로 독점되고 있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 공동체가 아닌, 소비사회를 형성한다. 서사는 마치 상품처럼 생산되고 소비된다. 소비자들은 공동체, 즉 우리를 형성하지 않는다. 서사의 상업화는 이들에게서 정치적 힘을 빼앗는다. 그렇게 특정 상품에 공정무역과 같은 도덕적 서사를 씌워 도덕마저 소비 가능하게 만든다. 서사적으로 중개된 도덕적 소비는 그저 자기 가치만을 높일 뿐이다.
자기 최적화, 자기실현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서사 또는 진정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급증하는 개인 서사가 공동체를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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