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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사소한 독서

김기태, 「세상 모든 바다」

by 하늘밑 2025. 3. 13.

근시의 사랑
 
이 소설에는 ‘세상 모든 바다’(世界すべての海, ALL THE SEAS OF THE WORLD)라는 다국적 걸그룹이 등장한다. 세상 모든 바다(약칭 세모바)는 블랙핑크만큼 매혹적일 뿐 아니라 U2만큼 사회적이고, BTS이후 가장 성공적인 케이팝 그룹이다. 40을 넘긴 작가가 가공의 걸그룹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TV를 켜고 유튜브를 검색했을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애썼네’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심지어 세모바를 이렇게 언급했다. “그들은 아름다웠고, 유능했고, 심지어 옳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표현이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김기태 작가는 분명 케이팝과 걸그룹을 좋아하는 찐 팬이다.
 
나도 덕후는 아니지만 나름 걸그룹에 관심이 많다. 그 기원을 따져보면 ‘트와이스’ 때문이다. ‘트와이스’는 2015년에 데뷔한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9인조 다국적 걸그룹이다. 멤버는 모두 엠넷에서 방영된 서바이벌 프로그램 SIXTEEN을 통해 선발되었다. 트와이스가 친근할 수밖에 없었던 건 걸그룹이어서가 아니라 센터이자 리드보컬인 나연이가 내가 가르쳤던 학생이어서였다. 나연이는 작고 동그란 얼굴, 적당한 키에 희지도 검지도 않은 건강한 피부를 가진 발랄한 학생이었다. 머리는 늘 이마에 자로 재어 놓은 듯 가로로 잘라 최근 유행을 충실히 따랐고 춤과 노래에 뛰어나 각종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 눈에는 그저 아이돌이 되고 싶은 또래의 여학생이었다는 것. 미래의 스타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나 아이돌 하는 건 아니니 공부도 좀 하라고 핀잔을 주었으니 나연이에게 나는 자신의 꿈을 인정하지 않은 매몰찬 교사의 표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졸업앨범 하복 사진을 찍으려고 옅은 화장에 한껏 멋을 내던 나연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연이에게 “만 명의 중에 한 명 만이 오디션에 뽑혀 스타가 된다면 그게 바로 너야! 힘내!”라고 진심 어린 칭찬을 해 주고 싶다. 내 책장 한 구석에는 마젠타 색상의 트와이스의 첫 번째 앨범이 꽂혀있다. 타이틀곡 ‘OOH-A하게’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CHEER UP’과 ‘TT’로 이어지는 역대급 히트곡의 첫 시작이었다.
 
트와이스와 나의 접점 때문인지 소설 ‘세상 모든 바다’는 흡입력 있게 다가왔다. 노골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케이팝 그룹, 아이돌의 팬덤문화, 이태원 참사가 떠오르는 안타까운 죽음, 소셜 미디어를 통해 무분별하게 오가는 정보들, 모두가 요즘 세대의 경험이 되기에 충분했다. 책을 읽는 내내 국적도 정체성도 희미한 26세의 청춘 하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일교포 4세대, 일본인이고 한국말을 잘하지만 늘 경계인의 모습이었다.
 

“동료들의 머릿속에서, 나는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과 비슷한 존재인 것일까 걱정됐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감추고 싶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세모바의 팬이라는 것밖에 없는 16세 소년, 백영록은 세모바의 게릴라 라이브가 있다는 하쿠의 말을 믿고 콘서트 현장에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비 오는 날 십삼만 명이 운집한 잠실 주경기장에서였다. 하쿠에게 백영록의 죽음 이후로 혼란스러움, 불편함과 책임감이 엄습하였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세모바’를 정말 좋아하기는 한 것인지.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가 세차게 튀어 올랐다. 알굴에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낌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

 
하쿠는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듯 근시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근시는 눈앞의 사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걱정이나 근심이 없다. 마치 지하 소극장에 모인 오타쿠들처럼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멀리 있는 사물을 보려는 순간, 미간을 찡그리며 억지로 눈의 초첨을 맞추어야 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생긴다.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세상 모든 바다는 모든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다. 근시의 사랑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세상은 근시의 사랑을 경멸한다. 철이 들고 세상에 익숙해지는 삶이란 어쩌면 근시의 사랑을 잃는 것이다. 청춘은 늘 근시와 원시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하쿠뿐이겠는가? 오늘날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렇다. 하루하루 마냥 행복했지만 한없이 불안했던 젊은 날이 떠올랐다. 내게도 근시의 사랑이 있었던가? 그게 ‘트와이스’였다면 나름 행복하다.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떤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걸그룹 TWICE(트와이스)의 첫번째 앨범(2015), 전설의 시작이었다. 타이틀 곡 'OOH-AHH하게'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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