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리내,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순진했던 산골 소녀가 잔혹하고 거친 세상을 이겨내고 강인한 인물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한 인생 전체를 다루는 방대한 스케일과 창의적 서사, 격동적이고 맹렬한 에너지, 속도감 있는 전개, 참신한 인물들의 조합,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의 반전, 액션과 멜로가 뒤섞인 극적인 재미. 한반도 역사의 격랑에서 묵직하게 다가오는 주제의식은 덤이다.

오랜만에 가장 한국스러운? 번역소설을 읽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여기저기서 차용한 듯한 뜬금없는 설정이 있지만 그 정도야 이야기의 힘이라고 해두자. 정유정의 소설 이후로 400쪽 넘는 소설을 이틀 만에 읽은 것은 처음이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책의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이 끌린다. 한국스럽다고 한 것은 작가가 40대, 그것도 토종 한국인이어서 그렇다.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나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홍콩대학 대학원에서 비교영문학을 공부했다. 가족과 홍콩에 거주하며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것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영어 원제목은 『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로 ‘이름 없는 여자’가 아니라 ‘백 년이나 산 사기꾼’정도로 풀이해야 옳지만 자기 정체성을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로 바꿔가며 기구한 운명을 살아간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거부감 없는 제목으로 바꾼 것 같다. 이 소설은 이미 미국의 대형 출판사인 하퍼콜린스와 파격적인 인세 계약을 맺은 뒤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된 후 큰 호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2024년 7월에 번역, 발간되었다.
작가가 왜 굳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썼을까 의문이 있었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설은 주인공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한국전쟁, 한반도의 이념적 분단상황을 종횡무진 오가는 약 100년의 역사를 장대하게 담아 냈다. 한국 특유의 지리적 여건이나 사투리, 문화적 정서를 반영하여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가 영문학을 전공했고 일차 독자층을 영어권으로 정했다면 영어로 소설을 쓰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전히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점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2025년 5월, 성수동에서 있었던 작가의 북토크 기사(The Korea Times 2025.06.01: Eight lives, two languages: The trickster art of author Mirinae Lee)를 읽어보니 작가는 2010년도부터 한국어로 소설을 쓰려고 했다가 좌절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다 영어로 바꾸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고 하는데 영어가 자신에게 자유와 해방이라는 심리적 공간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행히 한국어 번역은 전문가를 만나 영어의 번역투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깔끔하다. 뛰어난 한국소설이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그렇고 그런 이국소설로 남는 것보다는 애초에 그런 장벽을 없애는 획기적인 방법을 작가가 찾은 것 같아 반갑다.
이 책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목차에서 볼 수 있는 장의 구성인데 주인공의 인생 역정을 여덟 가지 인생으로 교차구성 하되 각 장의 서술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마치 소설을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로 영상화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시선을 사로잡는다. 각 장의 타이틀은 소설을 읽기도 전에 호기심을 무한대로 자극하고 작가가 일부 장을 이미 단편소설로 출간했을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The 5th Life: Virgin Ghost on the North Korean Border
The 1st Life: When I Stopped Eating Earth
The 3rd Life: Bring Down the House
The 2nd Life: Storyteller
The 4th Life: Me, Myself, and Mole
The 6th Life: The Spy Who Writes Yellow
The 7th Life: Confessions of an Ordinary Marriage
The 8th Life: 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
다섯 번째 인생 - 북한 접경지대의 처녀 귀신
첫 번째 인생 - 내가 흙 먹는 것을 멈추었을 때
세 번째 인생 - 하우스를 뒤집어놓다
두 번째 인생 - 이야기꾼
네 번째 인생 - 나, 나 자신, 그리고 볼록한 점
여섯 번째 인생 - 노란색 글씨의 공작원
일곱 번째 인생 - 평범한 결혼에 대한 고백
여덟 번째 인생 -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기진맥진한 채로 우리 교회에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온 낯 선 여자. 그녀는 젊은 여자의 몸에 갇힌 늙은 유령처럼 보였다. 그녀가 내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눈가에 잔주름은 없었지만, 그녀의 눈은 늙은 남자의 그것처럼 고단하고 침착하고 당당해 보였다. 많은 슬픔이 담겨 있었으나 후회의 기미는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을 고백할 때 흔히 그러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페이지들─남편의 폭력적인 속박에 갇혀 살던 몇 년, 중국 사창가에서 보낸 몇 개월을 묘사할 때조차 그녀의 눈은 의연하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불안한 짐승의 발톱처럼 손을 움켜쥐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은 반쯤 개화한 연꽃처럼 살 짝 안으로 말린 채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야단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그녀는 짧고 간결한 문장을 고수했고, 과장의 유혹에 굴복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즉시 그녀의 말에서 정직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녀의 진지한 태도가 좋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나는 그녀가 살아온 삶과 그녀의 고요한 태도에 절로 겸손해졌고, 그것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우리 교회는 그녀에게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했고, 곧 그녀는 내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 인생」 루소의 고백 중에서

'극히 사소한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홍,『말뚝들』 (2) | 2025.12.10 |
|---|---|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1) | 2025.12.04 |
|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0) | 2025.11.25 |
| 멜 로빈스, 『The Let Them Theory, 렛뎀 이론』 (1) | 2025.11.24 |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FACTFULNESS』 (1) | 2025.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