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1. 부끄러운 기억
1990년일 것이다. 종로 2가에는 상권의 터줏대감이자 약속의 명소인 맥도널드가 있었다. 맥도널드가 1988년 한국에 처음 들어와 문을 연 곳이 강남의 압구정이라면, 종로점 맥도널드는 강북을 대표하는 직영 2호점으로 요즘 스타벅스나 할리스커피처럼 매우 핫한 명소였다. 수도권에서 자란 촌놈이었던 나는 대학에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종로에 나와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고 종로서적을 둘러보는 것이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맥도널드를 찾던 나의 안온한 일상과는 반대로, 1990년의 대한민국은 혼란과 분노의 정국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지만,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군정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전두환에 이어 또다시 노태우가 집권했다. 시민들은 이에 분노했고, 1988년 총선에서 야당에 힘을 실어주며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냈다. 야당은 힘을 모아 TV 생중계로 청문회를 열고,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 언론 통폐합과 전두환의 권력형 비리 등을 국민 앞에 여실히 드러냈다.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고 전교조가 결성되었다. 경제 정의 실천 시민 연합 등 시민운동이 태동하였다. 1989년 이후로 방북 사건이 줄을 이어 일어났다.
여당인 민정당은 위기를 느꼈다.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에게 밀려 이인자로 전락했던 통일민주당 김영삼은 신민주공화당과 손을 잡고 여당과 기습적인 합당을 선언했다. 그 결과 1990년 1월 22일, 삼당합당으로 거대여당인 민자당이 탄생했다. 여당과 야당의 야합이었다. 김영삼의 정치적 야심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그 해 5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금요일 오후, 친구와 함께 맥도널드를 찾았다. 그런데 근처에서 삼당합당을 규탄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촌에서 모였던 시위대가 서대문을 지나 광화문까지 진입했고, 전경들과 격렬히 대치하고 있었다. 광화문 우체국 사거리와 보신각 일대는 최루탄이 난무했다. 시위대는 종각을 지나 종로 2가까지 후퇴해 오고 있었다. 최루탄 발사소리와 함성이 연이어 터지며 일대의 교통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마에서는 삐질삐질 땀이 흘러내리고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머릿속의 핏줄이 터지듯 눈앞이 아찔하기만 했다. 종로대로는 시위학생들과 차량, 시민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나와 친구는 당황했다. 시위에 참여해야 하나, 아니면 어디론가 피해야 하나. 그사이 메케한 최루액이 맥도널드 2층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얼굴에 두건을 두른 한 남학생이 기침을 연신 내뱉는 여학생을 부축하고 2층으로 비틀거리며 올라왔다. 백골단과 최루탄을 피해 숨어든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대는 와중에 남학생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내 또래로 보였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탁자 위엔 먹다 만 햄버거가 나뒹굴고, 엎어진 콜라컵은 바닥을 흥건히 적신채 누군가의 발에 밟혀 찌그러져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저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햄버거를 베어 물고 있던 내 모습이, 한가하게 책이나 보려 했던 나의 옹졸한 모습이 탁자 위에 투명하게 어른거렸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종로거리여야 할 것 같았고 저 남학생 대신 내가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맥도널드에 뛰어들어 왔어야 할 것 같았다. 도심 시위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나? 아니며 차라리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나? 나는 더없이 연약한 경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2. 이처럼 사소한 것들
주인공 펄롱은 미혼모에게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었고 미시즈 윌슨의 경제적 도움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펄롱은 운이 좋았다. 기술학교를 나와 석탄야적장에 취직해 석탄과 목재를 나르며 안정된 삶을 살았다. 딸들을 수녀원이 운영하는 좋은 학교에 보냈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잠들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펄롱이 살던 1980년대 아일랜드 소도시 뉴로스가 실업과 빈곤으로 쇠락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수녀원에 석탄배달을 갔다가 어린 여성들에게 폭행과 성폭력, 정서적 학대와 노역, 그들이 낳은 아이를 팔아넘겨 이득을 취하는 수녀원의 추악한 모습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찾은 수녀원에서 감금되어있던 미혼모, 어린 세라의 손을 잡고 수녀원을 빠져나왔다.
펄롱은 자신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일상의 모든 것을 잃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최악의 상황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덜어 내었을 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두려움보다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게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펄롱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었다.
펄롱은 세라를 보며 자신이 미시즈 윌슨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친절하게 펄롱을 가르치고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후원하였다. 자신이 누렸던 사소한 것들이 누구에게는 너무나 사소하지 않은 특별한 경험들이 될 수 있다. 펄롱은 세상에 한 명 정도에게는 자기가 받았던 미시즈 윌슨의 따뜻한 도움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일상의 사소한 것을 누리도록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다시 1990년 5월로 돌아가면 맥도널드 2층이 아니라 종로대로의 시위현장에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아서 후회를 남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무엇인가 세상을 굴러가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 품격을 지키는 일,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어 실천하는 일 등은 사소해 보이지만 소중하고 위대한 일이다. 그런 위대한 마음으로 극히 사소한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생각한 것을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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