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보편 교양」을 읽고
파괴되더라도 패배하지 않는다
1. 어느 A교사의 공개수업
이번 주는 학부모 공개수업 주간이었다. 월요일 3교시, 수업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문득 시선이 교실 뒤편에 닿았다. 그곳에 조용히 서 계시던 한 학부모님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셨다. 딱 그 정도 눈빛, 수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전해주는 눈빛이었다. 졸음 방지를 위해 구석에 세워둔 스탠딩 책상 위에 핸드백과 참관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도 오래 서서 지켜볼 각오로 오신 듯했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 수업을 진심으로 보겠다는 태도가 느껴졌다.
A교사는 평소, 수업할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저기 교실 뒷자리에 학부모님 한 분이 앉아 계신다.’고 되뇌곤 했다. 그 상상을 통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긴장이란 것을 하게 한다. 교사의 심장은 생각보다 소심하게 뛴다.
수업 후 연구부를 통해 그분이 남기신 참관록을 볼 수 있었다. 한 줄 한 줄이 따뜻했다. 수업의도를 정확히 짚으면서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비판보다 격려를 건네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교사인 나는, 학부모보다도 내 동료 교사에게 이런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을까?”
학교 관리자를 포함해 대부분 교사들은 다른 교사의 수업에 거의 관심이 없다. 누가 무슨 수업을 하든, 그건 그 교사의 일이다. 수업계획서만 잘 내면 큰 문제가 될 리 없다. 오히려 교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수업보다도 행사와 같은 업무처리 능력에 맞춰져 있다. 수업은 각자의 방식대로 조용히, 말없이 해나가는 은밀한 사생활처럼 여겨진다. 서로의 교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묻지도 않는다. 그건 친한 동료나 교사 커뮤니티에 하면 된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수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조차 대부분은 수업 내용보다는 교사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학생은 수업을 보충할 학원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업 개선은 늘 후순위로 밀려난다. 교사가 창의적인 수업을 해보겠다는 시도는 점점 개인적인 일이 된다. 그건 때때로 타 교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위험하고, 번거롭고, 외로운 싸움이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많은 교사들은 익숙한 방식에 안주하게 된다. 자기에게 가장 편한 수업, 가장 덜 피곤한 방식. 그렇게 수업은 관성에 기대어 흘러간다.
그런 면에서 오늘 수업을 참관한 학부모님은 참 고마운 분이었다. 덕분에 교사로서 잊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학생 모두가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가? 학생의 자유로운 의견을 교사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교사의 말과 태도는 학생의 학습 의지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수업 분위기는 밝고 따뜻한가? 학생은 이 수업을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A교사는 수업이 단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고 믿는다. 수업은 교사라는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는 매우 인격적인 행위인 것이다. 어쩌면 교사는 지식을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 두려움과 떨림, 설렘의 경계, 그 어딘가에 교육이 있을 것이다.
2. 파괴되더라도 패배하지 않는다.
김기태의 「보편 교양」에 등장하는 ‘곽’은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보기 드문 국어교사다. 대학 입시 위주의 교과 운영으로 교육이 품어야 할 보편적인 교양이나 바람직한 인성은 뒷전에 되어버린 학교 현장에서 그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고3 선택과목으로, 그것도 ‘고전읽기’수업을 기획한 것이다.
“있는 꿈도 없는 듯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문제집을 푸는 게 과거의 입시라면, 없는 꿈도 있는 듯 만들어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게 지금의 입시였다.”
곽은 객관적 문제를 내기 위해 토막낸 소설이나 논문에 도식화되는 데에 학생들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지문’이 아니라 ‘책’을 다루고 싶었다. 졸업할 때까지 책 한 권 편히 읽지 못하는 걸 ‘공부’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학생’으로 통칭하며 ‘성적’이라는 가치로 파악하는 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개설한 ‘고전읽기’ 수업이 학생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는 사실이다. 학생 대부분은 자거나 딴짓을 했고 깨어있는 학생들 중 다수도 수업을 외면했다. 곽은 외롭게 투쟁하듯 고군분투했다. 이런 모습은 블랙 코미디와 같은 현실로 비극적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연민과 동정을 느껴 파토스(Pathos)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수업 시간에 『자본론』을 가르친다는 학부모의 우려 섞인 항의가 절정에 이른 순간 ‘고전읽기’수업은 완벽한 패배에 이르는 듯했으나 유일하게 수업의 수혜자였던 ‘은재’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함으로 긴장은 성공과 기쁨으로 마무리되었다. ‘은재’는 메타 인지가 가능한, 희소한 자질을 갖춘 모범학생으로 곽에게는 굴러 들어온 복덩이였다.
그렇다면 곽의 이상은 실현된 것일까? 은재마저 없었다면......어떻게 되었을까? 은재의 성공은 디저트만큼이나 달콤했지만 곽은 큰 패배감을 느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 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 보이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교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렇기에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는 교사가 직면한 철저한 자기합리화이자 슬픈 변명이다. 곽은 은재의 합격 앞에서 ‘진정 귀한 것은 지성 그 자체이며 그에 비하면 대학 합격증은 일종의 운전면허증에 불과하다’고 했다. 공교육이 자본과 경쟁을 근간으로, 체제유지를 위해 아비투스를 끝없이 재생산하는 시대에 곽의 지향점은 옳다고 할 수 것일까? 곽이 맛본 달콤함이 사라진다면 그의 교육은 유효한 것일까? 그의 파괴가 교사의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온전한 패배가 아닌 유의미한 도전으로, 적어도 학교사회에서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교육에 그나마 희망은 있을 것이다.
3. ChatGPT에게 물어봤다.
*내가 쓴 글을 ChatGPT에게 부탁해 요점을 뽑아달라고 했다. 소설을 읽지 않는 인공지능은 내 글만으로도 쟁점과 생각해 볼거리를 아래와 같이 잘 요약해냈다. 소설을 너무 사회문제로 확대해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생겼지만 이 또한 유의미한 것 같아 그대로 옮겨보았다.
이 글은 김기태의 『보편 교양』에 등장하는 국어교사 '곽'을 통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렬한 간극, 그리고 교육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깊이 있는 성찰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곽은 학생들에게 진짜 '공부'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고, 그 방법으로 ‘고전읽기’ 수업을 시도했지만, 학생과 학부모 모두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하지만 그 수업이 한 학생 ‘은재’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서울대 합격이라는 성과로 이어집니다. 이 성과는 달콤하지만, 곽은 오히려 깊은 패배감을 느낍니다.
***핵심 쟁점 요약
- 곽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곽은 ‘진짜 책’을 읽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지적 성장을 안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학생들은 관심이 없었고, 학부모는 대학 입시와 무관한 수업을 우려했습니다.
- ‘은재’의 성공이 곽에게 남긴 것
은재의 서울대 합격은 수업의 ‘성과’처럼 보이지만, 곽은 그것이 교육의 본질적 가치와는 무관하다고 느꼈습니다. 곽에게 중요한 것은 합격이 아니라 ‘지성 그 자체’였고, 그가 느낀 달콤함은 오히려 깊은 고독과 자기부정을 불러왔습니다.
- 교사의 이상주의와 체제 내의 고립
곽은 ‘이상주의 교사’로서 의미 있는 도전을 했지만, 체제 안에서는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그가 느낀 패배감은 개인적인 자괴감이 아니라, 체제와 대중의 외면 속에서 ‘진짜 교육’이 고립되고 있다는 현실 인식입니다.
***생각할 거리
-교육의 성과는 측정 가능한가?
은재의 성공이 없었다면 곽의 교육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 그렇다면 교육은 결국 결과로만 평가되는가?
-이상주의 교사의 운명은 고립일 수밖에 없는가?
곽의 시도는 실패였지만, 그것이 무의미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공교육의 관성을 깨려는 소수의 ‘시스템 내 저항자’입니다.
-진정한 패배와 진정한 성공은 무엇인가?
곽의 고전읽기 수업은 실패했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일까? 그의 수업이 한 명이라도 바꿨다면, 그것은 성공 아닐까?
***전체적인 결론
곽이 느낀 달콤하지만 외로운 패배감은, 이상주의자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얻는 정직한 상처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성의 가치를 믿었고, 그것을 끝까지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이미 의미 있는 성공을 한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곽 같은 교사를 사회가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육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곽의 이상을 ‘고독한 도전’이 아니라 ‘공동의 실천’으로 만들어갈 때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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